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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랑 종파에 대한 분석

   중동의 역사는 이슬람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 이슬람의 지대한 영향을 받아왔으며 이슬람과 관련된 역사적 사건들이 중동사 대부분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가 한 학기동안 배운 중동사 입문이 이슬람의 기원과 함께 시작되는 것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중동의 역사는 이슬람 역사와 함께 세계사 가운데서 큰 의미를 부여받고 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중동사의 호흡이라고 할 수 있는 이슬람은 중동의 역사적 전장에서 어떠한 역사를 전개해왔는가? 아마도 그것은 현재까지도 지속되어오고 있는 끊임 없는 중동권 이슬람교 분파간의 분쟁을 통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분파에는 어떠한 것이 있으며, 그 이슬람의 분파는 어떠한 배경 가운데서 생겨난 것인지, 각각 어떠한 성격을 띠었기 때문에 이슬람이라는 하나의 통합적 종교이념 아래에서 그토록 오랜 세월을 거쳐 대립을 이루어 왔는지에 대한 의문이 자연스럽게 생기게 된다. 아래에서는 그러한 주제들을 놓고 이슬람 종파의 가장 큰 두 세력인 수니(Sunni)파와 시아(Shia)파에 중점을 두고 그들 종파의 각 특징과 서로간의 유사점과 차이점, 그들 사이의 역사적 분쟁 사례들과 이 두 종파 이외의 작은 종파들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논하도록 하겠다.

< 이슬람 종파 분열의 배경 >

 

먼저 시아파와 수니파가 등장하게 된 배경부터 알아보도록 하겠다. 모하메드가 622년 메디나로 도망을 간 것이 이슬람의 기원을 이루는데, 그는 그로부터 10년 후인 632년에 갑작스런 죽음을 맞게 된다. 유일신 알라의 마지막 예언자이자 사도였던 모하메드가 살아있는 동안, 모슬렘들은 그가 계시하는 메시지를 당연하게 여기고 수용하였었다. 하지만 모하메드가 죽고 나서, 그가 자신의 후계자에 대한 지침이나 유언을 남겨 놓지 않았기 때문에, 남겨진 모슬렘들 가운데 심각한 혼란이 초래되었고 이것은 곧 이슬람 사회를 지도력의 위기에 봉착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지도자 부재의 상황은 모슬렘들로 하여금 오로지 코란과 하디스만을 의지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도록 만들었다. 그들은 효과적인 지도력을 가지고 움마를 통치할 수 있는 후계자를 시급히 선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에 대한 의견의 합치를 보았다. 많은 논쟁 속에서 최종적으로 모하메드의 가장 신뢰받던 친구인 아부 바크르가 선택되었고, 그는 ‘칼리파트 아슐 알라’ 즉, 하나님의 사자의 후계자라는 칭호를 얻으며 이슬람의 종교적, 정치적 지도력의 통합체인 칼리프(Caliph)가 되었다.

이로부터 4대 칼리프의 시대가 시작되게 되는데, 칼리프의 계승 문제를 놓고 의견을 대립하는 두 세력이 등장하였다. 초기의 칼리프는 세습이 아니라 만장일치 선출제로 운영되었는데, 한 세력은 이러한 4대 칼리프 선출 방법에 정당성을 지지하였던 세력들이고, 다른 세력은 3 대까지의 칼리프들은 모두 힘의 논리에 의해 선출되었기 때문에 정통성을 부여할 수 없으며, 진정한 후계자는 사도 모하메드와 같은 하쉼(Hashim)가문의 출신으로서, 그의 곁에서 신앙과 도덕성을 함께 갖추게된 알리의 후손이 사회 전반을 올바르게 다스리는 칼리프가 되는 것이 합당하다고 주장한 세력들이었다. 전자가 수니(Sunni)파이고 후자가 시아(Shia)파이다. 쉽게 말하자면 수니 정통 4대 칼리프를 모두 인정하는 입장이고, 시아파는 정통 칼리프 중 유일한 모하메드의 혈족인 4대 칼리프 알리 만을 정통으로 인정하는 부류인 것이다. 이것이 움마 공동체가 수니파와 시아파로 분열 되도록 한 가장 근본적인 종교적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 수니(Sunni)파에 대한 분석 >

 

그럼 이제 좀 더 구체적으로 수니파와 시아파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우선 수니파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다. 수니파는 정통파라고 불려지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수니파 이슬람들은 코란이 최종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는 계시이며 더 이상의 계시는 이에 첨부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시아파와의 가장 큰 차이를 이루는 수니파의 면모이기도 하다. 또한 이들은 이슬람 공동체인 움마(Umma)안에 전통적인 행동 양식인 수나(Sunna-관행)를 보호하고 추종하고자하는 경향이 강하였으며, 이에 대한 예시로 ‘수니’라는 단어가 ‘길, 관행’ 이라는 의미인 수나의 파생어라는 것을 들 수 있다.

수니파의 형성에는 위의 종파 분열의 배경 과정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칼리프 제도의 확립과 페르시아인에 대한 아랍 민족의 우월권을 확보하기 위한 정치적 동기가 강하게 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4대 칼리프들의 전승의 정통성을 인정하였고 제 3대 칼리프인 우스만의 지지 세력이었다. 우스만은 우마이야 가문의 사람으로서 당시 우마이야는 기득권 층으로서 상당한 권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또한 수니파의 종교적인 특색을 살펴보자면, 이들은 이슬람의 교리에 있어서 각 분파의 견해 차이를 상당히 포용해 왔으나, 이슬람 역사 초기의 이단적인 분파들이 나타나 이슬람 역사의 정치적, 및 사회 경제적 흐름을 융합시키려고 하자 수니들은 다른 종파들의 종교적 일탈과 혁신을 격렬하게 비판하였다. 이처럼 이들은 종교적으로 비교적 온건적이고 보수적인 성향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들은 칼리프의 역할에 대해서 제한을 두고 있는데, 그들은 칼리프를 성원에서 예배를 이끄는 지위에 한정시켜 두었다. 이는 그들이 모하메드가 알라의 마지막 예언자이자 사도임을 강력히 표명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의 주요 관심거리는 믿음과 행위, 운명예정과 자유의지, 개시와 이성, 신의 유일성이 함축하는 것과 코란의 영원성, 코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할 것인지에 대한 것들이었다고 한다. 수니에게는 네 가지 학파가 있는데 그들을 ‘4법학파’ 라고 칭하며 종류에는 하나피, 샤피, 말리키, 한발리 등이 있다. 다수의 모슬렘에 의해 정통성을 인정받은 수니파는 현재 전체 모슬렘들의 약 83% 이상을 구성하고 있으며 많은 기득권을 누리고 있다. 이러한 특성을 통해 수니파는 대다수의 모슬렘들이 따르는 확립된 교조가 되어갔다.

 

모슬렘 국가의 수니파와 시아파의 비율

시아파는 이란에 집중적으로 분포해 있으며, 수니파는 오만과 사우디 등지에 많이 분포되어 있다. 이라크는 시아파가 수니파 보다 더 많이 분포되어 있으나, 수니파의 지배 아래에서 오랜 고난과 핍박을 받아왔다. 지표를 통해 대체로 수니파가 쉬아파에 비해 상당히 많이 분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 시아파에 대한 분석 >

 

다음으로 시아파에 대해 알아보도록 한다. 시아파에서 ‘시아’의 어의는 ‘시아트 알리(알리와 그의 후손을 따르는 사람들)’로 곧 ‘시아’로 다시 단순화되었다. 어원의 뜻을 살펴보면 시아파의 정치적 성향을 대중 짐작하게 한다. 모하메드가 죽자 메디나에서는 모하메드의 사촌이자 사위인 ‘알리’가 칼리프로서 가장 자질이 있다고 믿는 소수 집단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모하메드가 실제로 후계자를 지명하였으며, 그 사람은 바로 알리라고 믿었다. 시아파의 시각에서 보았을 때, 알리의 칼리프로서 가지고 있는 독특한 자질은, 모하메드의 유언을 통해 표현된 대로 신의 명령에 의해 임명되었다고 하는 또 다른 차원을 갖는 것이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알리는 또한 신적인 영감을 갖고 있으며 오류와 죄가 무결하고 따라서 그의 지식에서나 예언자의 뒤를 이은 가르치는 권위자로서나 그는 완전하다고 하는 것이다. 알리와 그의 동료들은 선거제를 통하여 이맘을 정하는 것을 반대하였고, 이러한 그들의 성향은 모슬렘 다수파로부터 시아파를 분리하도록 만들였다.

이러한 알리의 후계자 계승은 메디나에 있던 그의 일파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고 곧 시아파는 자신들의 교리를 만들었는데, 그들의 교리는 보다 폭넓은 인식을 받아들이는 것이 특징이었다. 이들의 교리에 따르면 이맘들은 종교적인 지시를 내릴 수 있는 힘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여기서 이맘이란, 후계자이자 영적인 지도자를 의미한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논점은 이슬람 교리와 종교적 주장의 해석에 관계된 것이었다. 이것은 그들이 코란의 가르침과 이슬람의 성스러운 율법이 인간을 넘어선 곳에서 나온 것이며 따라서 인간의 이성으로는 파악될 수 없는 진리를 담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슬람 계시의 참된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맘이라고 하는 종교적인 권위자가 필요하다고 시아파들은 인식했고, 그들은 이맘이 코란의 메시지를 추가 할 수 있는 신적인 영감과 알라의 권위를 함께 갖는 다고 믿었다. 시아파들은 이맘을 지나치게 추종하고 숭배하여 외부에서 보았을 때는 이것이 또 다른 신격화, 혹은 모하메드가 뒷전으로 밀리는 듯한 인상을 주었기 때문에 시아파들은 모든 모슬렘들에게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다른 종파 보다 좀 더 극단적이고 급진적인 이슬람 분파로 이해되기도 한다. 이러한 시아파의 이맘에 대한 신격화는, 여러 세기동안 많은 사람들이 차기 이맘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명분이 되어주었다. 그들은 각각의 주의를 내세우며 모슬렘들을 재통합하려고 노력하였는데, 이러한 노력은 지하드(Holy war)로 자주 표출 되었다.

다른 종파에 비해 두드러지는 시아파의 특징은 이맘의 무결점성, 마흐디 사상과 이맘의 부활, 타끼야(믿음의 가장)와 구속적 순교에 대한 믿음을 들 수 있다. 우선 이맘의 무결점성이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시아파의 이맘은 도덕적 사회적 종교적으로 완전 무결하고 고결한 존재라는 것이다. 또한 이맘의 부활이란, 알리 이후 11명의 후계자들 중 마지막 12대 이맘이 압바시야조의 당시 수도인 이라크의 사마라시에 볼모로 잡혀가 그곳에서 홀연히 사라졌다. 그는 지상에서 보이지 않게 되었지만 결코 죽은 것은 아니어서 ‘숨은 이맘’ 으로써 오랜 은둔생활을 하고 있을 뿐이라고 시아들은 생각한다. 또한 그가 언젠가 지상에 마흐디로 나타날것이라고 믿는데 이상에서 예측할 수 있는 것처럼 많은 인물들이 스스로 마흐디로 자처하면서 등장하였다. 이것을 이맘의 부활과 마흐디 사상이라고 한다. 또한 시아파는 수니파의 박해에 짓눌려 살아왔기 때문에 자신의 신분 즉 시아파임이 드러날 경우 자신과 가족의 생명 또는 재산에 손실을 입을 부득이한 처지에 놓일 때 수니파 또는 다른 파의 소속으로 자신을 위장할 수 있다. 이것을 타끼야(믿음의 가장)라고 부른다. 대부분의 시아파는 이것을 교의로 삼고 있다고 한다. 알리의 아들인 후세인이 할리파위를 되찾기 위해 반란을 일으키다가 680년 이라크의 카르발라에서 참혹하게 살해 당하는데 이러한 그의 비극적인 죽음은 시아파 모슬렘들에게 구속적인 순교의 성격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시아파는 이교적 요소가 다분히 혼합되어 신비주의적 경향을 띠고 비합리주의적인 신학을 발전시켜나갔고 또한 알리의 후계자 계승이 모든 시아파의 동의를 받은 것도 아니었었다. 그래서 곧 다른 세력이 시아파로부터 떨어져 나와 이스마일파(7이맘파), 무피파, 알라위, 샤피, 하니피리, 자이드파 등등의 작은 분파가 생겨나게 되었다. 사회에서 억압과 탄압을 받게 되면 소수는 과격파를 구성해내는 것이 세계사의 보편적인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시아의 각 분파중 암살단파는 십자군들이 가장 두려워 했던 존재라고 한다. 또한 근간에 들어서 시아파가 국제적인 이슈의 무대에 오르게 된 것은 시아파 중에서도 소수의 급진성과 과격함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이슬람내의 반이슬람적이고, 정확히 순니에 무조건 반대하는 폭력집단이라는 생각과 이란의 반아랍적 정서의 산물이라는 생각은 지나친 편견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말한바와 같이 시아파들은 모슬렘들의 83% 이상을 점하고 있는 수니파에 비해 약 10% 정도를 점하고 있는 소수파이다. 이들은 페르시아만의 산유국에 많이 분포하고 있으며 이란은 인구의 90%가 시아파로 구성되어있다. 그 이유는 이란이 유일하게 시아 이슬람을 국교로 선정하였던 국가 이기 때문이다. 이라크의 바그다드 정부는 소수의 수니파 모슬렘들이 다수의 시아파들을 지배하고 있는데 특히 1990년대는 이라크 시아파 모슬렘들에게 걸프전쟁 등의 고난과 전쟁을 가져다 준 시기였다. 두 집단간의 긴장은 수년 동안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으며 시아파는 사회적 평등과 경제적 정의 실천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

< 수니파와 시아파의 비교 >

 

 

Sunni

Shia

예언자

신의 계시를 인간에게 전달하는 단순한 임무만을 부여받았으며, 알리 중심의 이맘 제도를 거부함

높은 학식을 소유하고 신적 속성을 소유하고 있는 완전 무결한 존재이며 알리와 그의 자손 중심의 이맘 제도를 추종함

메시아

최후의 심판 날에 등장함

12대 이맘 <무하메드 알 문타자르>가 재림하여 메시아로 등장

이슬람 법칙

하나피, 한발리, 말리키, 샤피 등 정통 4대 법학파를 인정

6대 이맘 <자으파르 알 사디크>의 자으파르 법전만을 인정

예배

하루 5번 예배

5번 예배를 3차례에 나누어 실행할 수 있도록 허용

예배방식

예배 시 두 팔을 앞으로 포갠다

두 팔을 포개지 않고 밑으로 내려뜨린다.

결혼

결혼의 기간을 정해 놓은 계약결혼은 죄악으로 간주

12대 이맘이 일시적인 결혼을 인정하였으므로 죄악시 하지 않음

종교적 관행

성인 숭배사상을 비난하며, 성인 사진을 전시하지 않는다.

성인들에 대한 숭배의식과 성인묘소에 대한 방문과 순례의식이 포함되어 있다.

종교축제

680년 카르발라에서 우마이조 칼리프 야지드에 의해 알리의 아들 후세인이 순교 당한 달인 무하르람을 이슬람력의 첫 번째 달로 기념

이 당시 후세인의 도움 요청을 거부하고 그를 구출하지 못한 것을 참회하기 위해 채찍으로 가슴을 후려치는 의식을 하며 무하르람 10일을 애도의 달로 기념

 

 

출신 가문

쿠라이쉬 가문. 메카의 기득권층.

알리의 하쉼가. 비기득권층.

비중이 큰 국가

이라크.사우디.예맨.오만 등 다수지역

모슬렘의 약 83 % 차지.

이란.레바논.시리아.인도의 소수지역.

모슬렘의 약 10~20% 차지

종파의 성격

온건적. 보수적.

급진적. 근단적. 공격적.

< 기타 다른 종파에 대한 분석 >

이슬람의 움마들은 모두 그들의 교리를 바탕으로 움마를 운영해 오면서 각종 의견 차이로 점차 작은 분파들로 나뉘었는데 시아파의 대표적인 분파인 이스마일파와 카리즈파, 열두 이맘파, 자이드파, 암살단에 대해서 간단히 알아 보도록 한다.

우선 이스마일파는 수니파의 분파이며 이들은 6번째 이슬람 지도자의 둘째 아들인 이스마엘을 믿고, 이스마엘이 마지막 진정한 지도자였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오직 그의 자손들만이 정치적인 지도자가 될 수 있으며, 이들은 Fatimid 칼리프의 제도를 이집트의 카이로에 세웠으며 다시 알라위파와 드루즈파와 같은 여러 가지 계열의 분파가 다시 발생했다.

다음으로 카리즈파에 대해서 알아 보자. 무함마드가 사망한 후 우스만이 살해당하자 예언자의 사촌이며 사위인 알리가 그 뒤를 이었다. 그가 살해범의 체포에 주저하자 우스만의 무아위야가 복수를 외치며 무슬림끼리의 내란에 돌입했다. 이 내란 중에 무아위야의 평화협상 제의에 직면한 알리파는 주전파와 협상파로 갈라졌다. 주전파는 절대신 알라만이 중재를 할 수 있고 인간은 현 상황에서 계속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알리의 진영을 떠나니 이것이 이슬람 역사상 최초의 종파 카리즈파이다. 카리즈파는 전투적인 청교도이고 행동주의자여서 법을 그들의 손으로 집행하고자 했다. 그래서 지하드(Holy war)를 여섯번째 '신앙의 기둥'으로 삼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당성을 너무나 확신한 나머지 그들과 생각을 달리하는 무슬림을 살해할 정도였다. 그들은 무슬림이면 누구나 칼리파가 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였고, 그들의 만민 평등주의적 입장과 아랍 귀족층에 대한 적개심 때문에 베드윈과 비아랍계 무슬림 가운데 상당한 추종자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 파의 추종자는 오늘날까지 미미하게 존속하고 있다.

시아파의 85%를 이루고 있는 열두 이맘파는 오늘날 무슬림세계의 중요한 소수파를 형성하고 있다. 이들은 알리를 포함하는 12명의 이맘을 인정하는 파이다. 이들의 시아이슬람은 이란에서 16세기 이후 국교가 되어 국민의 90% 이상이 믿게되어 절대다수를 이루었고, 이라크에서는 인구의 과반수 이상을 점유하고 있으나 정치적 사회적 영향력에 있어서 순니파무슬림에 비하여 열등한 지위에 있기 때문에 사회적 갈등 분위기가 꿈틀거리고 있다.

하지만 시아무슬림 모두가 열두 이맘파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자이드파는 열두 이맘 가운데 후세인의 아들로 끝나는 제4대 이맘까지만 인정한다. 그 이름은 후세인의 손자 자이드에서 유래했다. 즉 자이드를 포함한 다섯 이맘에게만 마술적 능력을 인정한다하여 다섯 이맘파라고도 부른다. 자이드파의 교리는 알리 이후 모든 칼리파의 합법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순니와 구별될 게 거의 없다. 비록 이맘파 즉 칼리파는 하싼이나 후세인의 자손 가운데서 나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그들의 이맘은 완전무결성이나 인간과 신 사이의 중재적 기능을 지녔다고 보지 않아 단순히 왕이나 최고 종교지도자에 불과하다.

 

이스마일파에 속하는 한 페르시아인 지도자는 11세기 말에 카스피아해 남쪽에 있는 산속에 그 추종자와 함께 난공불락의 요새를 만들었다. 그들의 이름은 암살단파(Assassin)로, 이 명칭은 대마초를 뜻하는 아랍어단어 al-hashishin 에서 유래하여 십자군을 통하여 유럽 각국어로 알려졌다. 최근 그들이 정치적 살인을 감행했다는 사실은 확실한 것으로 증명됬다. 암살은 그들에게 있어서 종교의례적 행동이어서, 가해자는 항상 단검을 사용하였고 도피하려고 시도하지 않았으며 암살대상자는 대체로 고위직의 인사였다. 하지만 암살단파가 테러행위를 무기로 삼은 것은 극단적 소수파의 저항전술로 이해된다. 그들의 최종목적은 그들이 옹립하고 있는 숨은 이맘의 통치체제를 전영역에 확립하는 것이다. 그 전제조건은 수니 이슬람을 파괴하는데 있었다. 그러나 암살단파가 기대한 것은 실현되지 않았다. 수니 이슬람은 쓰러지지 않았고 숨은 이맘은 그 자신의 통치영역을 확립하지 못했던 것이다. 13세기에 들어와 암살단파 내에서도 내분이 일어났다. 현재 남아 있는 이 파의 추종자는 페르시아에서 인도로 도망한 자칭 한 이맘의 지도아래 19세기와 20세기에 그 모습을 나타내고 있지만 그 근원은 모호한 편이다. 그러나 이들은 더 이상 암살을 자행하지 않으며 주로 사업에 종사하여 상당한 성공을 거두어서 다른 무슬림의 부러움을 받고 있다.

 

지금까지 이슬람의 종파들에 대해서 분석을 해오면서 실감하는 것은, 이슬람 종파간의 차이라고 해도 기독교의 감리나 장로회 정도의 종파 차이일 것이라는 생각은 큰 오산이라는 것이다. 이슬람이라고해서 다 같은 교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며, 이슬람의 각 종파간의 특징들은 오히려 카돌릭과 개신교와의 차이보다도 더욱 갭이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료를 살펴보며 이러한 차이들의 근원지는, 물론 종교적 요인을 제외할 수는 없겠으나, 정치적인 요인이 컸던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조사하면서 얻은 정보에 의하면 이슬람교는 현재 전세계에서 가장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종교라고 한다. 한 통계에 따르면 지난 50여년간 기독교는 47%의 성장을 보인 반면 이슬람교는 500%의 급성장세를 보이고 있다고 한다. 선교 전문가들은 이같은 추세가 계속된다면 21세기초에 전세계 인구의 26.7%가 이슬람화될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하지만 국제적으로 이슬람권에 대한 관심은 늘어가고 있으나, 이슬람권과 관련된 국제적 문제들 역시 증가해 나가고 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에서 이슬람교인들은 그들 신의 사도인 마호메트의 근본 교리들 중 하나인 “형제애”에 대한 고찰이 필요할 것이다.

 

<참고 자료 출처>

 

* 백과사전 & 이슬라미즘 홈페이지 수니파와 시아파 중 발췌

* 이슬람 초기의 역사 /버나드 루이스

* http://www.neemakim.com/islam4.htm

* http://blog.naver.com/uuuau/40002182501

 

 

 

 

중동사 입문

“중동 전쟁” 영상 후기

 

영상은 194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까지 지속되어온 이스라엘과 아랍국가들 간의 전쟁인 ‘중동 전쟁’ 대한 것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영상을 보고 이해하려고 열심히 노력했으나 영어의 사용으로 인해서 제대로 내용을 파악하기는 좀 어려웠다. 그래서 인터넷의 자료들을 조사해서 중동전쟁의 오랜 역사를 짧게 개관해 보도록 하겠다.

예루살렘이 로마에 점령되어 예루살렘 입성이 금지된 후부터 유대인은 세계각지 유랑생활을 시작한다. 이후 예수를 죽인 민족이라 하여 각종 박해를 받게 되는데, 영국이 1915년 오스만투르크에 대항하기 위해 팔레스타인을 아랍인에게 넘겨주겠다고 선언한 후 1917년엔 다시 팔레스타인의 유대국가 건설을 지지하는 발포어선언을 하게 된다. 전쟁 후 영국이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를 묵인하자 아랍인들은 유대인과 영국에 대한 테러를 가하였고 영국이 팔레스타인 문제를 유엔에 떠넘기고 철수해 버리자 동시에 이스라엘이 건국된다. 이후 이스라엘과 아랍제국간 6차에 걸친 중동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그들은 93년도에 평화 조약을 맺게 되고, 그로인해 중동전쟁은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내가 어떤 시각으로 중동 전쟁의 영상을 보았는지 간단하게 말하도록 하겠다. 중동전쟁에서의 갈등은 이스라엘의 국가 설립과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냉전시대가 끝나고 인류는 전쟁의 종식을 염원했으나 실상 현실은 반대였다. 계속 늘어만 가는 국지전들, 특히 중동이라는 역사의 전장에서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중동의 태풍의 눈 속에는 이스라엘이 있었다. 이스라엘이 다시 하나님께서 주신 그들의 땅으로 돌아온 것은 곧 팔레스타인들에게는 커다란 위협이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은 건국과 더불어 크고 작은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그리고 그 전쟁에서 승리함으로 영토가 확장되는 기쁨을 맛보았고 예루살렘 및 그들에게 의미있는 조상들의 영토를 다시 재탈환하게 되었던 것이다. 대체로 사람들은 예전에 잃었던 영토를 다시 찾기 위해서 전쟁을 벌이는 이스라엘을 비난할 것이나, 나는 아랍의 세력들 때문에 잃었던 영토를 다시 찾은 것이기에 아랍세력들이나 이스라엘이나 모두 같은 셈족이면서 종교차이로 싸웠던 것 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이 중동전쟁은 그 누구에게 더 큰 책임을 물을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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