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아나운서실은 올해 큰 경사를 맞는다. 한국어 연구회가 올 해 4월로 창립 20주년을 맞기 때문이다. 방송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방송언어가 일상의 언어 생활과 나아가 국어 문화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 데 착안하여 KBS는 보다 정확한 음성언어와 문자언어의 사용을 위해 1983년 4월 23일 아나운서실에 한국어 연구회를 설립하고 늘 음성언어를 사용하는 아나운서들에게 말의 파수꾼으로서의 소임을 맡겼다. 이렇게 해서 KBS 아나운서들은 시청자에게 사랑받는 사회자로서, 신뢰받는 뉴스 전달자로서 역할은 물론 우리말의 규범을 지키고 전파하는 역까지 맡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아나운서 고유의 방송 진행과 병행해야 하는 어려움 때문에 미진한 감이 없지 않지만 20년이 지난 시점에서 돌아보면 선배님들이 얼마나 고생하면서 오늘날까지 이끌어 오고 키워 오셨는지 미루어 짐작이 간다.
지난 20년 동안 한국어 연구회의 성과를 꼽자면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53집에 달하는 음성언어 관련의 논문과 「표준 발음 대사전」 「바른말 고운말」 「아나운서 교본」을 비롯해 15년에 걸쳐 발표된 남북한 언어 연구 논문 모음집인 「함께 가야 할 남북의 말과 글」 등 연구 출판 사업을 비롯해, 공무원과 경찰 군인들을 대상으로 바른 우리말 순회 강연을 하는 등 음성언어 교육을 통해 표준 한국어를 보급하고 가꾸려는 노력들이 대표적인 것이리라. 그런데 정작 이 외에 우리 아나운서들이 애착을 갖고 공들여 하는 일은 바른 우리말 전화 상담이다.
한국어 연구회 상담 전화(02-781-3838)을 통해 하루에도 수십 건에 달하는 우리말 상담을 하면서 가장 큰 소득은 바로 우리 아나운서들 자신이 배우는 바가 대단히 크다는 점이다. 흔히 가르치면서 배운다고들 하지 않는가. 상담 사례 가운데서 정말 말을 업으로 하는 전문가들도 헷갈리는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말 중에서 한자어로 된 단어는 글자의 모양도 비슷하고 뜻도 비슷해서 사용할 때 혼동되는 표현들이 여럿 있다. 운영/운용, 결재/결제, 혼동/혼돈, 실험/시험, 신문/심문, 행여/혹여, 복사/복제, 개발/계발, 합의/협의 등 일일이 헤아리기도 힘들 것 같다. 이 중에서 사전적인 의미까지도 비슷해서 정말 분별해 사용하기 힘든 경우를 든다면 단연 신문/심문이 으뜸일 것이다.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대형 사건이 일어날 적마다 신문 기사나 방송에 자주 등장하는 법적 용어가 바로 ‘심문(審問)’과 ‘신문(訊問)’이다. 사전적인 의미를 볼 때 ‘심문’은 자세히 따져서 묻는다는 뜻이고 ‘신문’은 캐어물음, 따져서 물음이라는 뜻으로 정말 구별이 안 된다. 그런데 이 용어들이 법률 용어로 쓰이면 그 뜻이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심문’은 법원에서 서면이나 구술로 당사자나 그 밖의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진술시키는 것을 말하고 판사가 원고나 피고에게 진술 기회를 주는 것도 심문이라고 한다. 한편 ‘신문’은 사법 경찰관이나 판사, 검사, 그 밖의 국가 기관이 어떤 사건에 관해 피고인, 피의자, 증인들에게 구두로 캐어물어 조사하는 것을 말한다. 참고로 덧붙이면 ‘심문’은 ‘살필 심(審)’자를 쓰고 ‘신문’은 ‘물을 신(訊)’자를 쓴다.
이 외에 행여/혹여도 혼동하기 쉬운 경우이다. 요즘 신문 기사 중에서 또는 방송 드라마 대사에서도 ‘행여’라는 표현만 쓰지 ‘혹여’, 또는 ‘혹시’라는 표현은 잘 쓰지 않는다. “행여 저를 잊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와 같은 표현을 들을 수 있는데 이 예문에서 사용된 ‘행여’는 어법상 어색하다. ‘행여’라는 부사는 사전적인 의미를 보면 ‘바라건대, 다행히’ 등 여러 가지 뜻으로 설명되어 있다. 일상 언어에서 ‘행여’를 긍정적인 경우나 부정적인 경우 두루 가리지 않고 사용하는데 ‘행여’는 긍정적인 경우에 사용하는 표현이다. ‘행’자가 ‘다행할 행(幸)’자를 쓴다는 것을 알면 아마 이해가 쉬울 것 같다. ‘행여’를 사용한 적절한 문장의 예를 들어보면 “행여 복권에 당첨되면 네게 근사한 저녁을 대접하마.” “치료에 행여 도움이 될까 하여 이 약을 보냅니다.”
그러면 ‘혹여’는 어떤 뜻일까? ‘혹여(或如)’는 혹시(或是)와 같은 뜻을 가진 단어로 ‘그럴 리는 없지만 만일에’ ‘어쩌다가 우연히’ ‘짐작대로 어쩌면’ 등의 의미를 갖고 있다. “혹여 오해하실 분이 계실까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혹여 아드님을 찾으면 꼭 연락을 주십시오” 등의 예문에서 알 수 있듯이 긍정적인 의미에서나 부정적인 경우에서나 두루 쓰일 수 있는 표현이다. 우리말의 어휘를 풍부히 하기 위해서 행여와 혹여 둘 다 살려 사용했으면 싶다.
끝으로 가장 최근 대구의 시청자께서 지적하신 것 중에 공감되는 내용이 있어 소개해 보고자 한다. 그 분 말씀인즉 “예전에 우리가 배울 적에 ‘탄생(誕生)’이란 말은 석가나 공자같은 성인 반열의 분들이 태어났을 경우에나 사용하는 줄 알았는데 요즘 어떻게 된 일인지 개가 새끼를 낳아도 탄생이라 하고, 심지어 딸기가 탄생했다고 하니 보다못해 전화를 한다”는 사연이었다.
전화를 받으며 그 분의 말씀이 다소 우습기도 했지만 정곡을 찌르는 지적이 아닌가! 이 글에서 굳이 ‘탄생’의 뜻풀이를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 분의 하소연 아닌 하소연 한 마디, “내 나이 70인데, 내가 방송을 보다 이런 경우에 화가 나서 얘기하면 손자, 손녀가 할아버지 별 걱정 다 하신다며 상대도 하지 않으니 할 수 없이 전화하게 됐다” 며 시간을 내주어 고맙다는 치하의 말도 잊지 않으셨다. 방송에 임하는 우리 모두의 숙제가 아닐 수 없다.
출처 : 방송관련인들의 쉼터[www.reporterclu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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