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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문화사  (원, 명, 청)


1. 원(元)제국의 성립과 동서문화의 교류


1) 몽골족의 흥기


- 몽골족은 대흥안령 에르구네하 유역에서 기원

- 요,금 시대에는 오논강 하류에서 유목생활을 하면서 이들의 지배를 받음

- 1206년 테무진이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칸(汗)의 지위에 올라 칭기즈칸(재위 1206-1227)이 되어, 세계사상 유례없는 대제국의 건설이 시작

- 몽골 부락민은 천호, 백호, 십호의 십진제적 군사조직으로 편성, 천호제를 바탕으로 친위대 조직 -> 이를 바탕으로 몽골제국의 성립과 세계정복을 가능하게 함


2) 세계정복과 원제국의 성립

- 테무진은 칭기스칸이 된 후 우선 만주를 치고, 서하(西夏) 등을 공략하여 중앙아시아의 교통로 확보

- 오고타이(태종, 1229-1241) ; 금을 정복, 고려 공격. 바투(Batu)를 파견하여 러시아를 정복하고, 폴란드, 독일, 헝가리를 공략.

* 8년간의 서방원정은 이탈리아 침략을 목전에 두고 오고타이의 부고로 진격을 중단하고 전군을 회군

- 동방에서는 헌종(1251-1259)과 그의 동생 쿠빌라이(세조, 1271-1294) 2대에 걸쳐 남송의 병탄을 꾀한 적극적인 활동이 전개

- 쿠빌라이 ; 수도를 북경으로 옮겨 대도(大都)라 하고 국호를 원(元)이라 함(1271). 고려를 복속시킴. 1279년 남송을 멸망시키고 전중국을 통일. 일본원정의 실패. 안남의 정복

- 몽골은 태조에서 세조에 이르기까지 불과 70년간에 서유럽, 인도, 이집트, 일본을 제외한 당시 세계의 거의 전부를 통일하여 인류사상 유례없던 대제국을 건설


* 대정복의 성공은 막강한 군사력에 의한 바 크지만, 아울러 당시 아시아 내부분열에 의한 약체와 동서무역로의 안정을 희구한 이슬람상인의 협력이 있었음도 잊어서는 안되겠다.


3) 4한국의 성립

- 광대한 제국의 영토는 일족 및 공신들에게 분봉되었는데, 세조때에 와서 크게 3가지로 나뉘어짐

* 중국본부․만주․몽골의 대부분을 직할지로 하고, 고려․티베트․안남을 직속지로 함

* 킵차크한국(汗國), 일한국, 차가타이한국, 오고타이한국 등 4한국으로 나뉨

- 몽골의 4한국은 처음부터 반독립의 경향을 띰 -> 세조가 즉위하여 수도를 북경으로 옮기고 본격적으로 중국지배정책을 펼침으로써, 정치중심지가 몽골본토에서 중국으로 옮겨지자 4한국은 세조의 이같은 통치방법에 반발하여 원의 종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원과 대립 -> 4한국의 독립


4) 원의 중국통치

- 몽골족에 의한 정복지 지배는 쿠빌라이의 즉위를 분기점으로 하여, 그 이전의 몽골제국시대(1206-1260)와 이후의 원제국시대(1260-1368)로 양분.

- 원제국의 성립으로 종래 몽골제국의 유목적 성격은 중국적 정복국가체제로 변환

- 원제국은 몽골지상주의에 입각한 민족별 신분제도를 세워 통치

- 역참제도의 정비

- 한족의 몽골화를 급속히 추진 -> 과거 중국문화에 쉽게 동화되던 유목민족과는 차이를 보임 -> 중국인의 반몽골적 감정 유발

- 칸위계승을 둘러싼 대규모적 반란, 경제에 어두운 원의 교초남발, 라마교의 과신에 따른 횡포, 절대다수인 한족의 반감 -> 14세기 중엽부터 도처에 농민반란 -> 1368년 멸망


5) 원대의 문화와 동서문화의 교류

- 서민문화의 발달 ; 민족차별정책으로 인한 한족의 문화활동 제한 -> 유학과 시문은 낙후. 서민을 대상으로 한 통속문학(소설, 연극)이 발달 -> 구어체소설도 발달(수호전, 삼국지연의의 원형이 만들어져 명청시대 문예에 큰 영향을 줌)


- 동서문화의 교류 ; 원대 문화의 역사적 공헌은 무엇보다 동서간의 문화의 교류에 있었다. 세계제국의 성립에 의한 국경의 소멸, 역참제도실시에 따른 교통로의 정비, 송대의 조선술에 의한 해로의 발달 등이 동서교통로를 편리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교통로의 발달은 육상의 문물교류 뿐만 아니라 아리비아․인도․중국 사이에 해상무역을 성행하게 하여 서방문물이 동방에 전래되고, 또 많은 종교인․여행가들이 중국을 내왕하게 되어 유례없는 동서간의 문물교류가 있었다.


* 마르코 폴로 : 17년간 원나라에서 머뭄 -> {동방견문록}

* 천문학의 발달 : 사라센문화의 영향 -> 곽수경의 수시력(授時曆)

* 아랍인 알라 웃딘과 이스마일 ; 투석병기의 개량 -> 남송 정복때 큰 공을 세움

* 카르피니와 루브루크 ; 카톨릭 선교사의 원나라 파견

* 종교의 자유로운 발전 -> 이슬람상인의 도래에 따른 이슬람교의 확장. 도교와 불교의 성행. 티베트의 불교인 라마교가 황실의 존숭을 받음. 경교의 유행.

* 원나라시기에 나침반, 화약, 인쇄술 등이 서방으로 전파



2. 명조(明朝)의 성립과 한민족문화(漢民族文化)의 재흥(再興)


1) 명의 황제독재체제

- 명의 건국과 통치체제

* 주원장(朱元璋)이 강남지방을 중심으로 중국통일(1368) -> 중국사상 강남에서 발흥하여 중국통일을 성취한 것은 명이 처음인데, 이는 강남지방의 개발이 충분히 이루어져 그 경제력이 화북을 능가하기에 이르렀기 때문

* 몽골풍의 일소와 침체된 전통문화의 회복 -> 황제의 강력한 전제정치와 대개혁 단행 -> 관료조직의 정비와 개혁. 대명률 제정. 이갑제(里甲制, 효율적으로 농촌을 통치하기 위한 농촌의 자치조직)실시.

* 주자학의 관학화와 과거제도의 부흥


- 영락제(永樂帝, 1402-1424)의 대외발전

* 몽골에 대한 전략상의 필요에서 수도를 남경에서 북경으로 천도

* 안남(安南, 베트남)의 정복과 5회에 걸친 몽골의 격파

* 주변국가와의 무역을 능동적으로 재개하고 조공국가를 유치하기 위해 정화(鄭和)로 하여금 남해원정을 단행하게 함 -> 26년간(1405-1430) 7회에 걸쳐 60여척의 함대에 2만 8천여명의 선원을 인솔하여 인도양은 물론 페르시아만, 홍해 및 아프리카 동쪽해안에 미쳐, 남해 30여국이 내공 -> 유럽인에 의한 인도항로의 발견에 앞선 동양인의 장거로서 후세 중국인의 동남아시아 진출의 기반을 닦음

* 대외무역의 제한 ; 육상교통로의 봉쇄와 왜구의 출현에 따른 해금(海禁)정책. 조공무역에 의한 관영무역만 허용 -> 부자유한 무역형식은 금령을 범하고 국외로 진출하는 자가 늘어남(남양화교의 기원)


- 명조의 쇠퇴 ; 영락제 이후 관료의 부패와 환관의 발호가 격심

* 내우외환으로 재정지출 급증 -> 경제파탄과 농민의 소요 -> 장거정(張居正)의 개혁정치

* 일조편법(一條鞭法) : 양세법을 근본적으로 개혁. 지조와 인두세, 그외 각종 부역을 하나로 합쳐 은납화.

* 당쟁의 격화와 환관의 가세로 인한 정치적 문란, 만력의 '삼대정(三大征)'으로 인한 재정의 악화 등 -> 민중의 유민화, 농민반란, 누르하치에 의한 여진세력의 압력 -> 이자성의 반란 -> 명의 멸망


2) 명대 사회와 경제

- 신사층(紳士層)의 성립과 향촌사회지배

* 신사층은 명대의 지방에서 큰 힘을 발휘한 계층으로 진신․향신 또는 향관이라고도 하는데, 대부분 지주층으로 구성되어 있는 교양과 학식을 갖춘 지식인층인 점에서 송대의 사대부와 같은 성격을 가짐. But 송대와는 달리 거인과 생원은 모두 종신토록 그들의 자격을 보장받았으므로 명 중기 이후 관료예비군으로서 그 수가 크게 증가하였기 때문에 지방에서 민중의 교육과 교화를 담당하고 여론을 조성하며 지방관과 긴밀한 유대를 형성하면서 향촌사회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


- 생산력의 증대와 자본주의 맹아론

* 명말․청초는 여러면에서 사회변화가 현저하게 이루어진 시대. 역사학계에서는 자본주의의 맹아가 이 시대에 나타났다고 하여 역사연구의 증요한 과제가 됨 -> 명중기 이후 생산력의 증가와 은경제의 보급, 상품경제의 발달

* 상품경제의 발달 -> 생산품의 전국적 유통 촉진 -> 명대 후기 전국적인 원격지 무역을 중개하는 거대한 객상자본이 성립(고리대자본가로 이익 추구)

* 15세기 이후 은의 일반적 사용(지세의 일부도 은으로 납부) -> 은본위 화폐경제 -> 16세기 말에는 외국상인에 의한 멕시코 은의 유입이 이를 더욱 촉진


3) 명대 사상과 문화

- 명대 문화의 특색

* 강한 민족주의의 성격과 함께 복고주의 경향을 지니게 되면서 독창성이 결여 된 점

* 송대 이래 일반화하기 시작한 중국문화가 금․원의 지배를 거쳐 명대에 이르러 서민문화로서 결실을 보게 됨 -> 이는 금․원 등의 이민족지배가 지식계급을 서민화하고 한편 상공업의 발달에 따라 그 담당자인 서민계급의 생활향상이 이루어진 것에 기인함

* 명말 기독교 선교사들에 의한 서양학술의 유입으로 촉진된 실학의 유행과 자연과학의 발달이 현저함


- 양명학의 성립

* 주자학의 관학화로 인한 자유로운 사상 발전 저해 -> 명 중기 양명학 탄생. 왕수인(王守仁 ; 陽明, 1472-1528)은 송나라 육구연의 학통을 뒤이어 '양지(良知)의 학', 즉 절대유심론을 대성시킴 -> 침체한 유학에 신생명을 주입하여 크게 유행하였으나, 후에 공소한 관념론에 빠지기도 함


- 경세실용사상

* 명말에는 서양학문의 전래와 사회경제의 발전으로 실용주의적 경세사상이 사상계를 주도 -> 학문의 관심도 중농, 중상, 부민, 금융 등 국민의 생활을 실제로 윤택하게 할 수 있는 것들 -> 대표적 학자로 서광계(徐光啓), 고염무(顧炎武), 황종희(黃宗羲), 그리고 청대의 왕부지(王夫之) 등이 있다 -> 황종희와 고염무 등은 당시 유행하고 있던 양명심학의 반문헌주의적 행동에 정면으로 반대하여 다음에 올 청대 고증학의 선구가 됨


- 서양문물의 전래

* 예수회 선교사들의 중국 진출 -> 프란시스 사비에르, 마테오 리치, 아담 샬 등

* 선교사들은 기독교 자체로는 사상적으로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으나, 그들에 의해 소개된 서양학술은 중국문화에 많은 공헌을 함



3. 청조의 성립과 중국지배


1) 청의 중국통치책

- 만주족의 중국정복 ; 중국사상 최후의 정복왕조

* 임진왜란 등 혼란스런 국제정세로 인하여 만주에 대한 관심이 소홀한 틈을 이용하여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일하고 국호를 후금(後金)이라 함(1616) -> 수도를 심양으로 천도 -> 태종때 국호를 대청(大淸)으로 함(1636)

* 세조 순치제 때 중국지배의 기초를 마련 -> 이자성의 난, 삼번의 난 토벌


- 강희․건륭시대 ; 중국의 통일을 완성한 17세기 후반부터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의 3대 약 130년간, 청조는 그 극성기를 맞이하여 전제군주권은 최고에 달하고 그 지배는 동아시아의 거의 전역에 미쳐 중국사상 유례 없는 황금시대를 출현시켰다.

* 강희제 : 러시아와 국경 체결(네르친스크 조약, 1688). 외몽골․티베트 정복

* 옹정제 : 완벽한 독재체제의 실시. 황태자 밀건법(密建法). 외몽골 방면의 러시아와의 국경선 정리. 티베트에 대한 보호권 확립. 준가르부의 토벌(군수방 설치 -> 후에 군기처로 발전)

* 건륭제 : 준가리아, 투르케스탄 원정 -> 파미르고원까지 청의 영토 확대. 미얀마와 월남을 속국으로 함


* 청은 만주, 중국본부, 대만을 직할지로 하고, 그밖에 내외몽골, 청해, 티베트, 신강을 번부로, 조선, 미얀마 , 샴(태국), 안남 등을 속국으로 하여 일본을 제외한 동아시아의 거의 전역을 지배하에 둠


- 청조의 중국통치

* 청조의 한인지배는 전형적인 정복왕조체제에 의한 통치 -> 강압책과 함께 회유책을 교묘하게 병용.

* 변발과 호복의 강요 및 반만(反滿)적인 서적의 금지 ↔ 한인의 등용과 한인지식계급의 회유. 많은 문화사업의 실시

* 중앙조직은 명의 제도를 대부분 답습. 향촌조직으로 보갑제(保甲制) 실시(향촌의 치안유지 담당 및 징세확보, 요역동원)



- 백련교의 반란과 청조의 쇠퇴 ; 18세기 후반 중국의 농촌사회는 인구증가에 따른 물가앙등의 악순환과 관료의 격심한 부패로 농민의 몰락이 일반화

* 종교적 비밀결사를 통한 농민반란 -> 백련교의 반란 (하남․사천․감숙지방) -> 팔기군의 쇠퇴로 인한 지방 한인 무력집단인 단련(團練)의 등장 -> 한인관료의 입지 강화 (단련은 후에 양무운동시기 지방군벌의 효시가 됨)

* 백련교의 반란으로 인한 재정의 낭비로 청조는 사회․경제적으로 쇠퇴기를 맞이하였으며, 아편전쟁으로 인한 서양세력의 진출로 반식민․반봉건화의 길로 들어섬


2) 청대 사회와 경제

- 청대 사회 ; 청대사회는 정복지배층인 팔기(八旗)를 제외하고는 명대와 마찬가지로 지주와 전호의 봉건적인 관계를 기반으로 하고 그 위에 관료와 신사 평민의 신분적인 질서 위에서 유지.

은에 의한 화폐경제의 진전에 따라 일조편법을 지정은(地丁銀)이라 불리는 통일적인 은납의 지조로 발전


- 농업생산력의 증대와 자본주의의 성장

* 강희․옹정․건륭시기 단위면적당 식량생산력의 증가

* 식량생산이 늘어 상품작물의 품종이 다양해 지면서 수공업발전의 조건이 마련 됨

* 차, 비단, 도자기 등은 중국의 특산물로서 서양에 수출되어 막대한 은의 유입을 초래(주로 멕시포 은) -> 중국에서의 은의 유통을 촉진시켜 국내의 상업번영을 가져옴 -> 객상의 활동(후일 지방재벌의 기초를 마련)

* 1684년 해금의 해재로 외국무역이 활발 -> 1757년 기독교의 금지와 더불어 외국무역도 광동항에 제한. 거래도 특허상인 조합인 공행(公行)에 의해서만 행해짐 -> 공행제도하의 무역관계는 1842년 남경조약이 체결될 때가지 계속


3) 청대 사상과 문화

- 경세․고증학의 발달 ; 청조 학문의 특징은 현실정치를 학술연구의 대상으로 하면서 실용주의 방향으로 연구가 진행되기 시작했다는 점

* 명말․청초의 변란과 이민족지배에 대한 반성으로 학문연구도 현실문제와 떨어질 수 없음을 깊이 인식 -> 유학의 근본정신도 경세치용에 있음을 깨닫고 실사구시의 새로운 학풍을 탄생시켰는데, 이것이 이른바 청대의 고증학.

▷ 청대 고증학의 발달은 청조의 문화통제정책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즉, 청조의 '문자의 옥'이나 강압적인 사상통제는 주관적인 정치론이나 화이(華夷)사상을 연구할 수 없게 하고 자연히 문헌에 입각한 고증주의를 취하게 하였다. 이와 함께 강희․옹정․건륭황제의 호학(好學)과 한인학자에 대한 회유책으로 재야학자를 동원하여 대대적인 편찬사업을 추진하였음도 고증학 발달의 중요한 원인이 됨

▷ 청대 고증학의 발달은 그 방법의 객관성과 실증성으로 인해 경학 이외의 독창성을 촉발시켰다. 청대에 특히 사학을 비롯하여 지리학, 음운학, 문자학, 금석학, 목록학, 천문학 등 다방면에 걸쳐 광범하게 학문이 발전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고증학의 영향에 의한 것이다.


- 동서문화의 교류

* 아담 샬, 페르비스트 등으로부터 천문학, 역법, 포술, 지리학 등이 전해짐

* 전례문제로 인하여 주로 선교사들에 의한 문화교류가 건륭제 이후 아편전쟁까지 단절

* 당시의 유럽 선교사들은, 중국인이 유럽에 대한 이해가 없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중국의 문물을 열심히 연구하여 서양에 소개한 결과, 유럽의 중국연구를 촉진함으로써 중국학(Sinology)의 발달을 가져왔을 뿐더러, 당시의 서양문화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동양문화사 제5강 (중국 중세사회의 문화)


1. 위진남북조 시대의 문화


6조시대는 정치적 측면에서 본다면 혼란기라고 할 수 있으나 문화사적으로 보면 빛나는 특색을 지닌 시대다. 종교면에서는 불교가 비로소 지식계급에 뿌리를 뻗어 발전하고 도교가 종교로서의 체계를 확립하며, 문학․예술이 유교의 속박을 벗어나서 그 독립을 얻게 된 것도 이 시대에 일어난 문화적 현상이다.

한나라 시대의 절대적 전제군주제 아래의 지식계급-사대부의식을 규제하던 것은 유교정신이었다. 유교는 국가의 정통학문으로 공인받았을 뿐 아니라 사회․사상․문화의 모든 분야를 지배하였고, 그 결과 종교․문학․예술은 정치나 도덕에 대해서 봉사를 강요받았으며 그 독자성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후한말부터 사대부들이 귀족화되고 왕조권력이 약화되면서 유교의 권위는 옛날과 같지 아니하였다. 6조 사대부층이 유학을 수학하는 풍습은 예와 다를 바 없었으나, 그것은 사대부의 교양으로서이지 한나라 시대처럼 [수신제가(修身齊家)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라는 유학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1) 사상


- 노장사상(老莊思想) ; 유가에 대한 안티테제로 생겨난 것인데, 유가가 도덕이라는 인위(人爲)를 존중하여 허위․허식에 빠지기 쉬운 경향이 있으나, 노장은 인위를 배척하고 자연, 진실됨을 추구한다. 또 유가가 국가사회를 제일의적인 것으로 삼아 개인을 그 종속물로 보려는 경향이 있으나, 노장은 오히려 개인을 구극적으로 보려는 입장에 서 있다. 이런 노장의 입장은 6조인의 생활태도에 적합하였다 → 청담(淸談)의 유행 → 죽림칠현(竹林七賢) ; 기행을 행하였으며, 그 일면에는 세속에 반항하는 정신이 있었다. 세속을 벗어난 진실한 것을 추구하려는 노장사상이 정신적 뒷받침이었지만, 귀족사회가 안정되어 가면서 점차 유희적인 요소가 많아져 사상적 발전은 불가능하였다.


- 불교 ; 불교가 사대부계급에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동진(東晋) 초부터이다. 위진시대의 사대부는 노장사상에 깊이 심취되어 처음에는 노장의 [무(無)]를 통해서 불교의 [공(空)]을 이해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초기 불교는 노장적 성격이 짙었으나, 점차 불교가 노장을 압도해서 6조 사람들의 인생관을 지배하게 되었다. 종래의 중국인은 현세만을 믿었으나 여기서 비로소 영원에 대한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북조에서는 국가권력의 비호로 더욱 융성하여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운강(雲崗)․용문(龍門) 등의 석굴․석불은 당시 불교의 성황을 말해주는 기념물이다. 남조의 경우 특히 불교의 독신자인 양무제(梁武帝)는 불교를 보호하였을 뿐 아니라 많은 사탑을 만들었다.

불교의 도입은 중국의 사상계에 새로운 요소를 더해서 그 면목을 일신시킨 반면, 사탑․가람의 건축, 불상의 조영, 의례의 수입으로 여러 가지 문물이 들어오고, 특히 미술․공예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우리나라의 불교도 이때 중국에서 전해진 것이다.


- 도교 ; 후한말 오두미도(五斗米道)․태평도(太平道)를 거쳐서 점차 종교로서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원래 신선장수설(神仙長壽說)을 중심으로 하는 민간신앙을 도가에 가탁한 것이었으나 외래의 불교 융성에 자극되어 사원․교의를 조직하게 되었다. 위진시대에 들어와서는 지식계급에 침투하여 진나라 갈홍(葛洪)이 {포박자(抱朴子)}를 저술하여 그 교의 확립에 기여하였다. 남조에서는 고금의 명필로 유명한 왕희지(王羲之)․왕헌지(王獻之) 부자도 대대로 도교신자였고, 북조에서는 도사(道士) 구겸지(寇謙之)가 북위의 재상 최호(崔浩)를 통해서 태무제(太武帝)의 신임을 얻어 폐불사건(廢佛事件)을 일으켰다. 그 결과 도교의 세력이 확대되어 불교에 대항할 수 있는 기반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원래 민간신앙으로 성장한 도교에는 그 교리도 불로장생이나 등선(登仙)에 한정되어 현실의 인생을 그대로 연장하려는 희구가 있을 뿐 진정한 종교철학으로 일상적 현실을 부정하여 초극하려는 정신이 결핍되어 있다. 도교교리의 깊이는 도저히 불교를 미칠 수 없었으며, 도사들은 불교의 교의를 받아들여 그 모방에 힘썼다.


2) 문학과 예술


- 문학의 특징 ; 유교의 속박을 벗어나 독자성을 가지려는 기운이 일어남. 문학의 독립에 따라서 사대부의 교양은 경사(經史)였으나 6조시대에는 문사(文史)로 바뀌고 사학이 오히려 문학에 종속됨(문학 지상주의). 6조 문학의 특징은 자연미의 사실적인 묘사와 노장사상의 영향.


- 형식지상주의․음운지상주의 ; 4․6 병려체(四六騈儷體), 이때의 문학은 형식을 중시하고 문학의 기교와 음운의 조화를 추구할 뿐 내용을 중시하지 않았다.


- 노장적 인생관과 자연관을 시로서 표현한 도연명(陶淵明), 서체로 유명한 왕희지(王羲之), 그림에 뛰어난 소질을 보였던 고개지(顧愷之) 등이 활약.



2. 당대(唐代)의 문화


1) 당문화의 특색


- 당나라의 개방적인 정책으로 외래문화가 많이 유입되어 국제적 문화의 성격을 띰


- 통일신라의 불교예술, 발해의 관제를 비롯한 문물, 일본의 대화개신(大化改新) 등은 당시의 당문화의 영향.


* 당의 문화는 외래문화를 흡수하여 이를 국제적인 문화의 수준으로 끌어올렸고, 다시 주변 여러나라에 영향을 주어 동아시아 문화권의 성립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 귀족적인 문화 ; 문화의 담당자층이나 문화를 향유한 계층도 천자․관료․귀족에 한정(당대 문화가 지니는 한계성). 그러나 남북조 이래의 귀족문화는 수당의 통일제국의 출현으로 일단 정리되고 귀족사회의 발전으로 전통문화가 더 한층 풍부한 내용을 지니게 되었다는 점에서 당대 귀족문화의 문화적 가치를 높이 평가할 수 있다.


* 당문화에서 특기할 것은 수당제국의 정치제도는 대체로 북조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으나, 문화면에서는 남조의 전통이 많이 채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와 아울러 6조시대의 중국 고유의 문화가 떨쳐 버리지 못한 점이 당대에 와서도 그대로 계속되었으나, 유학사상의 통일로 유학이 관학화하여 고정되었다. 통일제국의 출현으로 인한 국가권력의 학문에 대한 영향이 큰 것도 당대문화를 규정하는 한 요인으로 나타난다.


2) 시문(詩文)의 발달


- 당시(唐詩)는 중국인의 정신문화의 정수


- 시의 발달 원인 ; 6조시대의 병문(騈文)의 영향과 과거시험의 진사과에 시를 필수과목으로 부과.


- 이백(李白), 두보(杜甫), 왕유(王維), 백거이(白居易), 한유(韓愈) 등이 유명


- 서민사회에서는 소설(小說)과 변문(變文)이 유행


* 소설 ; 6조시대의 괴이소설의 영향으로 널리 성행. 외래문화의 자극으로 공상적인 내용이 추가되어 전기소설(傳奇小說)로 발달. 당나라 소설의 줄거리는 원나라와 명나라의 잡극(雜劇)과 전기소설의 원류가 됨.


* 변문 ; 불교경전의 내용을 이야기로 알기 쉽게 꾸민 것으로, 당의 중기 이후 서민문학으로 유행. 후에 백화소설(白話小說)의 원류가 되었으며 중국의 대중문학에 미친 영향이 큼.


3) 당대의 사상과 학문


- 유교 경전의 해석을 통일 → {오경정의(五經正義)} -> 학문의 자유로운 연구나 새로운 발전을 저해. 당대의 유학을 고정시킴


- 안사의 난을 고비로 학술과 사상계에 변동이 생김 -> 훈고학적 학풍에서 벗어나 유학의 근원을 구명하려 함 -> 송나라의 성리학은 8세기 후기 이후 나타난 당대의 학풍에 영향을 받음.


- 역사학의 변화 ; 종래 중국의 정사(正史)는 개인에 의해 편찬되었기 때문에 한권의 역사서에 편찬자의 통일된 사상과 서술상의 체계가 뚜렷이 잡혀 있었다. 그러나 당대에는 국가권력이 역사 편찬에 관여하여 칙명에 의한 역사펴찬이 행하여졌다. 역사학에 대한 아무런 지식도 없는 고급 관리가 감수자가 됨으로써 학자는 단지 짜여진 틀에 맞추어 기계적으로 역사를 편찬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칙령에 의한 정사 편찬은 당대부터 시작되어 이후 계속되었다.


4) 불교의 발전과 외래종교


- 불교 교단의 성립

* 천태종(天台宗) ; 제법실상(諸法實相, 현실 가운데 진실상을

발견하는 사상). 남방에서 발달


* 화엄종(華嚴宗) ; 사사무애(事事無 ) -> 이(理)와 사상(事象)이 하나일 뿐 아니라 事象과 事象이 서로 모순이 없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 송나라의 성리학 형성에 영향


* 삼론종(三論宗), 법상종(法相宗), 정토종(淨土宗)


* 선종(禪宗) ; 가장 중국적 불교로서 후세에까지 깊은 영향. 조용히 앉아서 선의 지경에 도달하려는 것은 불교가 처음부터 지니고 있었던 요소이지만, 이것이 하나의 종파로서 모습을 나타내게 된 것은 달마(達磨)에서 비롯되고, 그의 가르침을 받은 당초(唐初)의 혜능(慧能)에 의하여 선종으로 발전.


- 고승(高僧)들의 활약 ; 현장(玄獎) 등


- 마니교, 네스토리우스교(경교) 등이 유행


- 도교도 국가의 보호아래 세력을 확대 -> 당말 무종의 불교탄압은 도사(道士)의 건의에 의하여 단행된 사건. 국가권력의 보호는 도리어 교의면에서 위축을 초래해 사상내용에 있어서는 이렇다 할 발전을 이룩하지 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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