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품의 역사
1. 화장의 개념
신체의 아름다운 부분은 돋보이도록 하고, 약점이나 추한 부분은 수정하거나 위장하는 수단이다. 화장이란 말은 개화 이후부터 널리 사용된 외래어로서 가화(假化) ․가식(假飾) ․꾸밈 등의 뜻을 지닌다. 화장에 해당하는 순수한 한국어는 장식(粧飾/裝飾) ․단장(端粧/丹粧) ․야용(冶容)이고, 화장품은 장식품(粧飾品) ․장렴(粧) ․장구(粧具)였다.
이처럼 다양한 표현이 있는 것은 가리키는 의미가 약간씩 다르기 때문이다. 얼굴화장만을 가리킬 때는 야용, 몸단장에까지 이르면 단장, 일반적인 화장일 때는 장식(粧飾)이었고, 장신구까지 치장한 경우에는 장식(裝飾)이었다. 특히 옷차림마저 화사하게 하였을 때는 성장(盛裝)이라고 표현하였다. 화장의 농도에 따라서도 다르게 표현했는데, 엷은 화장인 경우는 담장(淡粧)이라 하였고, 짙은 색조화장인 경우는 농장(濃粧) ․단장(丹粧) 또는 성장(盛粧)이라고 구분하였다. 이는 한국의 옛 화장개념이 현대 개념과 달리 가화 ․가식 등의 미화개념으로만 해석되었던 탓도 있겠지만, 입체화장 ․수정화장을 하지 않고 평면화장에 치중했던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여염집 여성들이 평상시의 화장과 나들이화장을 구분하였고, 그들 자신의 화장과 기생(妓生) ․무녀(舞女) ․악공(樂工) 등의 직업적인 의식화장(儀式化粧)을 애써 구별하려 했던 관습에 기인하기도 한다.
인간이 언제부터 화장을 시작했는지를 밝히는 일은 고대와 현대의 화장 형태가 다른 점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지극히 어려운 문제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통설(通說)에 의하면 아름다워지고자 하는 욕망이 인간의 본능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지만, 종교적인 필요성에서, 자신을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신분 ․계급을 나타내는 수단으로서 태고적부터 치장했다는 이유를 들어 학자들은 화장의 기원을 인류의 생존과 같은 시기라고 가정(假定)한다.
- 화장의 기원
화장을 하게 된 원인과 이유로는 학문적으로 여러 학설이 존재하는데 아직 구체적으로 정립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 나름대로 시대적 배경과 필요성에 따라 각각 다르게 해석되어 왔으며 근본적인 목적은 개인의 미적추구 욕망과 종족 보존의 필요성, 사회적 분위기가 반영되어 끊임없이 발전되어 왔다. 여기에는 미화설, 보호설, 위장설, 신분표시설, 장식설, 종교설 등이 있는데 이것에 대해 알아보자.
1)미화설(이성유인설)
미화설은 자신의 신체를 타인에게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서이거나 혹은 우월성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메이크업을 했다는 학설이다. 또한 이성이 다른 사람의 관심을 끌기 위한 방법의 일환이었다는 것이 주목할만하다.
실제 고대 이집트 여인들은 유두에 붉은 칠을 하여 화장하였으나 입술은 붉게 칠하지 않았는데 이는 당시의 이집트 풍속에 입맞춤이라는 애정표시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떻든 인간의 본능적 욕구 중의 하나가 자신의 신체 일부분을 아름답게 돋보이고 일부의 약점을 커버하거나 수정하여 보다 더 아릅답게 보이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
2)보호설
인간이 자기 자신을 어떤 위험으로부터 보호, 위장하기 위한 치장이 미화수단으로 발전했다는 학설이다. 실제로 원시시대 사람들이 몸에 상처를 내거나 문신을 한 것은 적을 공포감에 몰아넣기 위한 행위로 시작하였다. 당시 신을 믿는 사람들은 마귀를 쫓기 위해서 얼굴이나 몸에 색칠을 하는 습관이 있었던 것이다. 또 이집트인들은 태양 빛과 곤충들로부터 눈을 보호하기 위해 눈 주위에 푸른색으로 짙게 감싸듯이 그려 주기도 하였다. 또 다른 예로서 1800년대의 여성들은 몸에 백납 분을 바른 것은 가스등이나 촛불의 그을음으로부터 피부의 노화를 방지하며 자외선으로부터 그들의 피부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3) 위장설
원시 고대인들은 자신의 몸에 새의 깃털이나 짐승의 뿔, 혹은 식물의 색소 등을 이용하여 얼굴이나 신체에 발라 자연 환경에 맞게 적절히 위장함으로써 전투에서 적을 위협하는 수단이나 자신을 은폐하는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4) 신분표시설
화장은 어떤 종족이나 개인의 계급 신분 부족의 우월성을 알리기 위한 신분 표시하는 설도 지배적으로 대두되고 있다. 이것은 나이, 신분, 계급. 종족, 남녀 성별을 구별하기 위한 목적으로 계층별, 연령별, 부족별 메이크업을 각각 다르게 표현했다는 견해이다.
5) 장식설
원시시대 인간은 옷을 입기 전에 나체상태에서 피부에 그림을 그려 넣거나 조각, 문신, 회화를 새겼는데, 이것이 화장의 시초로 보는 설이다. 즉 전쟁으로부터 생존한 무사가 부족에게로 귀환했을 때 자신의 신체에 남아있는 상처와 혈흔의 일부가 존경의 대상이 되고, 용맹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그 이후 자연스럽게 신체 일부분을 장식하거나 표시하려는 욕망이 원시의 지도자들로부터 시작되었다. 다양한 색체의 진흙이나 식물의 색료를 사용하여 얼굴, 머리 등 전신에 바르기 시작하였고 정복자가 피정목자에 대해서 예속을 과시하기 위한 형식으로 표시하였다는 학설이다.
6) 종교설
신에게 경배하기 위하여 향나무의 가지를 자르고, 향나무의 즙으로 바른 향수나 향료를 미화수단으로 이용하였다. 여러 가설은 어떤 시간에서 보든 간에 화장의 유래가 매우 오래되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2. 화장품의 정의
화장품이라 함은 화장하는 데 쓰이는 모든 물품, 크림, 분, 연지, 향수 등을 가리키며, 약사법에서 정해진 화장품의 정의는 “인체를 청결 또는 미화하기 위하여 도찰(塗擦) ·살포 기타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 사용되는 물품으로서 인체에 대한 작용이 적은 것을 말한다.” 그와 동시에 제조 ·판매, 그에 따르는 광고 등 모든 면에 규제를 받는 상품이다. 언뜻 생각할 때 상품명의 수가 많고, 많은 종류가 있는 것 같으나, 실제로는 법률의 정의에 따라 분류하면 5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① 인체를 청결하게 미화하고 피부를 건강하게 보전하기 위하여 도찰하는 종류로서 보통 기초화장품이라 부르며, 각종 화장수 ·크림류가 이에 속한다.
② 매력을 증진하고 용모를 변경시키는 종류로서 가루분 ·고형백분 ·크림 백분 ·파운데이션 ·입술연지 ·눈썹연필 ·미조료(美爪料) 등이 있는데 대체로 빛깔이 있는 화장품이며, 마무리화장품 또는 메이크업 화장품이라 한다.
③ 머리털을 건강하게 보존하고 아름답게 가꾸기 위해 사용되는 것으로는 두발화장품이라 하여 헤어 로션 ·헤어 토닉, 액상 및 유상 정발료, 헤어 크림 ·헤어 트리트먼트 크림 ·샴푸 ·헤어 스프레이 등이 이에 속한다. 콜드퍼머약이나 머리물감 등 직접 모질(毛質) 자체에 변화를 주는 것은 작용이 작다고 볼 수 없으므로, 의약부외품으로서 별도로 취급된다.
④ 미화하고 매력을 증진하는 것에 향수 종류가 있다.
⑤ 현재는 특히 남성의 피부를 위하여 사용하는 기초화장품, 즉 셰이빙 크림을 비롯한 애프터 셰이빙 로션, 남성 로션 ·크림 등, 남성화장품이 제조 ·판매된다. 향수도 남성용이 있다.
화장품의 동의어로 화장용품이라는 말이 있으며 역사적으로는 이 둘을 구별하여 사용한다. 즉, 화장품은 자가제조로 소량 생산된 것이므로 좁은 뜻의 화장품은 전문제조업자가 대량생산하여 상품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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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품의 기원은 유사 이전부터 종교적인 행사, 자기과시 또는 자연환경 등으로부터 자신의 보호를 목적으로 식물기름, 꽃잎, 숯, 황토 등을 사용하여 화장을 한 것에서 유래한다. 그 후 시대의 변천에 따른 산업의 발전과 공업적인 유기합성 기술이 발전되어 유화제, 계면활성제, 항산화제, 방부제 등이 개발되면서 본격적인 화장품의 발전을 가져왔다.
해방이전의 화장품 공업은 가내수공업 형태의 공업이었으나, 5·16 이후 정부에서 국내 산업 보호를 위한 조치로 특정 외래품 판매금지법을 재정 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국내 화장품도 많은 발전을 가져오게 된다.
3. 화장의 역사
화장은 고대 이집트에서 사회적 계급이나 성별을 떠나서 이미 보편화되어 있었는데, 그 기술이 상당히 세련되었었다는 것을 유물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부유한 가정의 여성들은 몸을 깨끗이 씻고 노예를 시켜서 온몸에 향유(香油)를 바른 다음, 긴 시간을 소비해서 정성들여 화장을 하였다.
초기에는 눈가를 공작석(孔雀石) 가루로 녹색 테를 그렸고, 후기에는 검은색으로 약간 굵게 테를 그렸다. 눈썹먹 ·입술연지 ·볼연지도 사용되었다. 때로는 이마나 가슴의 혈관에 청색을 칠해서 강조하였고, 손톱에는 식물성 염료인 헤나를 써서 진한 오렌지색으로 매니큐어를 하였으며, 가발은 동물성 지방으로 단정하게 손질하였다.
이러한 화장법과 화장품이 그 후 지중해 여러 나라의 화장법의 전거(典據)가 된 것으로 생각되는데, BC 1500년대로 추정되는 크레타섬의 ‘파리젠’의 화장법은 이집트의 화장법과 비슷하며, 그 중에서도 입술연지가 인상적이다. 고전기(古典期)의 그리스 여성들이 어떤 화장법을 사용했는지는 병에 그려진 그림이나 문학작품을 통해서 알 수 있다. BC 5세기의 아리스토파네스는 여러 가지 화장법이 있었음을 기록에 남겼고, 크세노폰도 BC 4세기의 창녀들이 연백(鉛白)을 짙게 칠한 위에 볼연지와 입술연지를 사용하여 피부를 장밋빛으로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연백은 납을 초에 담갔다가 깎아서 가루를 만든 다음 가열하여 분을 만들었다. 연지 중에는 광물질인 것과 식물질인 것이 있었는데, 식물질인 것에는 해초의 뿌리나 오디(뽕나무의 열매)의 즙이 사용되었다. 안료(顔料)로는 유연(油煙)이나 황화안티몬, 기타 연고와 몰약(沒藥)이 사용되었지만, 일반적으로는 올리브유가 많이 사용되었다.
로마시대에는 근동(近東)의 여러 나라에서 갖가지 화장품이 들어왔기 때문에 화장술이 급속히 발달하였다. 그리스에서와 마찬가지로 화장은 오전중에 노예의 손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목욕은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 냉수욕 ·온수욕 ·증기욕 ·약물욕 등이 있었다. 눈썹먹과 아이섀도도 있었고, 피부색에 맞춘 분과 연지도 있었으며, 향료를 특히 중요시하였다.
중세에는 전반적으로 특별한 발전이 없었고, 로마의 전통은 비잔틴이나 이탈리아에서만 살아 있었다. 비잔틴의 여성들은 눈썹을 뽑고 새로 그렸으며, 볼과 입술을 장밋빛으로 꾸밈으로써 그들의 화려한 의상에 걸맞은 기교와 양식을 창조하였다. 인간성의 해방을 몰고 온 르네상스는 나체와 관능의 부활에 의해서 화장미(化粧美)에도 새로운 기준을 탄생시켰다. 작고 정돈된 금발, 스스럼없이 노출시킨 풍만한 육체와 순백의 피부가 고조기(高潮期) 베네치아파(派)의 화가들이 그린 여성의 자태에 유감없이 표현되었다.
근세의 자연적인 화장법은 이러한 이탈리아식 화장법이 북쪽 지역으로 확대된 것에 불과하다. 무역이 발달함에 따라 시민생활은 풍요해지고, 여러 가지 화장품과 원료가 동방으로부터 수입되었다. 약국과 향료상이 탄생하고, 그 처방은 그대로 프랑스와 영국으로 전해졌다. 일반적인 화장은 궁정의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에게도 유행하였으며 향수가 풍부히 사용되었다.
18세기는 여성의 세기였다. 조발사(調髮師)와 미용사가 전성시대를 맞이하였으며, 짙은 화장이 유행하면서 화장품 광고도 선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유행은 궁정의 여성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에게, 그리고 모든 나라로 퍼졌다.
이러한 기준은 프랑스 혁명을 전후하여 무너지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은 J.J.루소 등이 제창한 자연주의와 영국 취미가 과잉장식을 단순한 것으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늘어뜨린 머리, 화장을 하지 않은 얼굴과 피부, 비쳐 보이는 의상 등이 이 시대를 풍미하였으며, 이로 인해서 화장은 향수만을 사용하는 것이 주가 되었다.
19세기로 접어들자 사회는 그 때까지의 어느 시기보다도 변동이 심하였는데, 이러한 물리적인 면에 비해서 화학, 특히 유기화학의 발달은 그다지 활발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19세기의 태반은 색을 연하게 한 단박한 화장과 짙은 머리, 뚜렷한 눈을 주로 하는 낭만적인 화장법이 지배하였다. 그러나 19세기 말~20세기 초에 걸쳐 의학과 유기화학이 급속히 발전하였고, 이와 병행하여 여성의 사회적 해방이 논의되고 스포츠가 유행하였으며, 의복이 단순화하는 경향을 보였다. 화장품이 대중화되어 대량생산되고, 의복의 간결화와 더불어 명확한 화장법이 차차 유행하게 되었다.
Helena Rubinstein의 논평에 따르면, 1차 세계대전 이후까지만 해도 화장품의 사용은 대중화되지 못했고, 아름다움 보다는 주의를 끌기 위해 자주 이용되었다고 한다.현대 화장품산업 발전의 근간은 튜브 개발(1890)과 모발에 웨이브를 넣기 위한 화학약품의 발견(1920), 샴푸(1930), 곱슬머리를 위한 콜드퍼머(1930)같은 것들의 발전에 있다.
4. 화장품의 역사
1) 종교시대 (초창기-이집트)
화장품의 역사는 고대 파미르 고원에서 향을 피운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고원의 주민이 그들의 신과 조상에게 제사를 지낼 때 제단에 향을 피워, 신과 조상을 맞이하는 신성한 장소임을 알렸으며, 그 향의 연기를 쏘인 사람은 저지른 죄와 잘못을 용서받아 그 제사에 참여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고 한다. 제단을 청정하게 하고 신성하게 하기 위해 향을 피우던 풍습은 점차 왕족이나 귀족의 생활 속으로 파고들어 그들의 주거지 실내에서 향을 피우도록 했다. 이때의 향에는 유향, balsam, 계피 등이 사용되었으며 이런 풍습이 그리스, 로마 등으로 전해지면서 향료의 종류가 변화해갔다. 로마의 전성시대 때는 장미향이 매우 인기였었다고 한다.
기름 향유를 발라 피부를 손질하는 것은 옛날부터 세계 각지에서 행해져왔다. 특히 이집트에서는 미이라를 만들 때 다량의 향유를 사용했다고 하며, 피라미드에서 발굴해낸 부장품 가운데 향유를 넣은 관이 발견되었고, 이는 그 당시 상류사회에서는 향유를 사용해 피부를 손질했다고 하는 증거가 되고 있다.
피부에 안료 등의 착색료를 칠해서 장식하는 것 역시 고대에서부터 행해져왔다. 메이크업은 처음에는 병, 악마 등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종교의식에서부터 시작되었지만 그 가운데는 종족의 상징을 표시하기도 하고, 같은 종족 사이의 지위나 역할을 나타내기도 했으며, 전쟁에 나가는 군사의 용맹성을 과시하는 등 여러 가지 목적으로 행해졌다.
지금 보면 기이한 느낌을 주는 것들이지만 그 당시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것으로 미의 관점도 달랐을 것이다. 따라서 그것이 그대로 오늘날의 Make-up의 원점이 되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런 고대의 풍습 가운데 아름답고 싶다거나 아름답게 가꾸고 싶다는 염원은 현대인에게도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2) 의학시대
① 헬레니즘 시대 (BC 5-7세기)
페르시아인들은 무력정복을 하면서 다른 나라의 화장법을 본 땄으며 인도의 정복과 함께 고대 아시아 문화의 비법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헬레니즘 시대에 들어 기원전 4세기말 알렉산더의 페르시아 정복은 향장술에도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으며, 의학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히포크라테스의 시대에 이르러 화장은 마술, 미신, 종교 등에서 벗어나 과학적 원리에 기초를 두기 시작한다. 피부병을 연구한 히포크라테스는 식이요법, 운동, 자외선, 특수탕, 맛사지 등의 조화로 아름다움은 이루어진다고 하는 이론을 발표했다. 이러한 이론은 현대 미용에 기여한 바가 매우 크다.
이집트의 마지막 여왕인 클레오파트라는 화장의 기교에 있어서 누구도 따를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눈 아래쪽에는 초록색을, 눈꺼풀, 눈썹, 속눈썹을 코울로 검게 칠한 이집트 여인들의 강렬한 눈화장이 잘 보여 주듯이 색채 화장을 비롯한 화장 기술은 클레오파트라의 시대에 극치를 이룬다.
기원전 3세기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가 죽은 뒤 로마는 전성기에 들어서고 문화의 중심으로서 자리를 굳혔다. 다음 3세기 동안 화장의 기교는 그 유례가 없이 호사스러워진다. 로마의 탕은 귀족 남자들이 증기탕, 향유, 맛사지, 향수 등을 즐겼는데 특히 장미향유를 즐겼다고 한다. 이때의 기름은 지중해 연안의 특산인 올리브유가 주를 이루었다고 한다. 한편 귀족 여자들 역시 집에서 여러 가지 미용법을 썼다고 한다.
기원 초기에 알려져있던 화장품의 종류를 살펴보면 요즈음 사람들이 쓰는 것에서 몇가지만 빼면 될 정도로 다양하다. 미용에 관련되는 도구에는 젖가슴 발육 기구까지 끼어있다. 화장품들은 오너트릭스라고 불리는 나이 든 여자 노예의 지도를 받아 코스메티라는 어린 노예들이 집에서 만들어 귀족에게 발라주었다.
역사상 로마에서 가장 사치스러웠던 여성은 로마의 폭군으로 알려진 네로황제의 부인인 포파에어 사비나로, 그녀는 동물의 지방이나 벌꿀, 곡식의 가루 또는 빵을 갈아서 으깬 것을 밀크에 섞어 얼굴에 바르고, 다음날 아침 씻을 때는 당나귀 젖으로 씻어냈다. 또한 로마인들은 목욕을 즐겼는데, 특히 귀족의 부인들은 보통의 목욕 뿐 아니라 피부를 아름답게 하기 위해 밀기울 목욕이나 당나귀 젖으로 목욕하기도 했다. 당나귀 젖으로 목욕하기 위해 포파에어는 여행 중 암 당나귀를 데리고 갔다고 하며, 그 수는 약 50마리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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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아라비아 시대 (7-12세기)
중세 초기의 서구는 암흑시대였지만 동방에서는 아라비아인이 그리이스, 로마의 학문이나 기술을 연구하고, 동시에 인도, 페르시아의 지식, 문화를 흡수하여 세계에서 가장 높은 문화를 형성했으며, 이 때 Make-up, 머리염색을 비롯하여 위생면에서 진전을 보였다. 아랍인들은 생리, 보건연구를 진전시켰고, 목욕, 식이요법, 운동, 맛사지 등의 치료효과를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화장품으로 단순히 결함을 보완하는 정도를 넘어서 근본적으로 이유를 찾아 해결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졌다. 이 시기에 이루어진 진보는 연금술, 식물학, 약학 등에 힘입은 것이며, 아시아로부터 들어온 새로운 식물과 물질은 향수류에는 물론 피부와 모발의 처리에도 유용하게 쓰였다. 이때의 향장품의 제법이나 기술은 널리 알려지지 않은 채 비방전을 통해 대대로 전승된 것으로 이런 작업은 주로 약제사들이 도맡았다고 한다. 새로운 식물과 물질이 발견되어도 일반적 건강관리에서 피부, 모발, 치아 등의 위생과 식이요법을 강조한 것이 주목할만한 특징이다.
한편 유럽에서는 서서히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그 뒤 십자군 운동의 영향으로 동방의 문화나 진귀한 물품이 서구로 전해졌으며, 다마스커스의 조직물, 아시아의 비로드, 동방의 화장수 등을 대표로 들 수 있다. 또한 로마식의 공중탕, 즉 터어키식 증기탕이 재현된다. 십자군이 키프로스섬에 침입했을 때 향기 좋은 꽃과 향료가 많이 있어 고향의 부인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가지고 왔는데, 그것을 장미의 물이라고 하였다. 그 장미의 물은 영국으로 전래되어 귀족들이 식사하기 전 손을 씻을 때 이용되기도 하였다. 영국은 이탈리아로부터 포크가 전해지기 전까지는 모두 손가락으로 음식을 먹었기 때문에 식사전에는 손을 씻어야만했고, 씻은 손을 테이블 크로스로 닦았다.
10 세기가 되면서 남프랑스에서 향료식물의 재배가 시작되었는데, 마침 그때 이탈리아에서 이 지방으로 이주해온 이주민 가운데 피혁직을 가진 사람들이 피혁의류 가죽 냄새를 방지하기 위해 다량의 향료를 소비해서, 향료식물의 재배는 날로 번창해갔다. 남프랑스는 지금도 세계의 천연 향료의 중심지로 번영을 누리고 있다. 또 의류에의 부향은 전통적으로 전해져, 지금도 프랑스의 유명한 향수 가운데는 드레스 디자이너의 협력에 의한 것이 많다.
3) 르네상스 시대 (13-16세기)
예술과 문학의 르네상스는 보통 14세기에 시작된 것으로 보지만 과학의 르네상스는 실제로 13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시기에는 의학으로부터 향장학을 분리시키려는 시도가 이루어진다. 십자군의 귀향으로 향장과 향료 연구에 큰 발전의 계기가 마련되고, 마르코폴로 등의 여행자의 전파로 유럽은 인도 외 동양의 문물을 많이 접하게 된다. 기록에 남아있는 것으로는 염료식물유, 나무껍질, 석면, 산화아연, 석유 향신료, 염료로서의 석탄 사용 등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이 새로운 색소들이 많이 알려져서 유화 및 염료에 뿐만 아니라 메이크업에도 쓰이게 된다. 15세기에는 머리를 뒤로 모아 쪽을 짓고 눈썹은 밀어서 가늘게 하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한다. 루스와 분은 아주 흔한 화장품이었으며, 동양에서는 눈화장도 흔했으나 서양에서는 별로 좋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5 세기말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으로 새로운 원료가 들어오는데 아스팔트, 페루발상, 피마자기름, 후추, 설탕, 황, 테레빈유 등을 들 수 있다. 불란서의 앙리 4세의 첫 왕비는 향장 기교가 매우 뛰어났고, 16세기 말에는 머리카락을 소다나 명반에 담갔다가 말리는 베니스식 탈색법을 사용하였다. 웬만한 사람이면 각종 향수류나 향장품을 만들어 쓸 정도였다. 향수가 영국에서 처음 제조된 것은 1573년이다.
분은 주로 흰납에다 수은과 흰 붓꽃을 섞어 만들었으며, 루즈에는 붉은 황토나 진사가 사용되었고 벽돌가루 등을 섞어 치아를 희게 하는 약을 만들어 쓰기도 했다. 물론 머리에도 상당히 신경을 썼다. 갖가지 방법으로 컬을 했고, 엘리자베스 여왕의 머리색인 적갈색을 따라 붉고 노란 머리가 유행하였다. 또한 염색에 걸리는 시간과 노력을 줄이기 위해 가발을 쓰는 여자들이 많아졌다. 엘리자베스 여왕도 가발을 사용했는데 한때는 그 수가 80개에 달했다고 한다. 이 시기의 가장 주목할만한 진전은 알코올과 그 증류방법에 대한 지식이 이루어진 것이다. 수세기 동안 과실류에서만 얻어온 알코올이 곡물에서도 추출이 가능하게 되었다. 알코올이 정식으로 향수류에 쓰이게 된 것은 14세기로 보인다.
4) 교역시대 (17-19세기)
17세기에 들어서면서 향장계는 두가지의 경향이 두드러진다. 그 하나는 의학이나 과학과 관련된 미학을 다루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패션과 어울리도록 단순히 외양적인 아름다움을 꾸미는 것이다. 16-17세기에는 연백을 원료로 하여 거기에 향료나 색을 첨가한 분을 페인트라 부르고, 연지나 그 외의 화장품으로 멋을 부리는 일을 페인팅이리고 하였다. 이렇듯 여성이 얼굴을 정성껏 치장하기 때문에 17세기 초의 시인 리챠드 쿠라쇼는 그것을 메이크업이라 불렀으며 이것이 Make-up의 유래이다.
백분을 두껍게 발라두고 그 위에 연지를 바르는 화장법은 18세기 말까지 계속되었다. 이 기간의 유행으로는 백분이 밑 화장이고 연지가 주였다. 그러나 1789년에 대혁명이 일어나자 프랑스에서는 여러 가지 유행을 악몽처럼 씻어내고, 창백하고 감상적인 화장법이 유행하기 시작하여 함부로 연지를 바르는 화장법은 천하게 여기게 되었다. 영국에서 비누는 1641년 처음으로 생산되는데 정부의 규제를 받아 2세기 동안 높은 과세에 묶여있었다. 피부 세정제로는 스페인에서 수입한 아몬드 열매, 연고, 코코아버터, 바닐라 등을 원료로 만든 크림을 썼다. 17세기 식민지 생활은 생존과 안보를 위한 투쟁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당시의 가정에서는 기름과 나무재로부터 비누를 만들어 썼다. 그러다가 비누에 고래기름을 넣게되고 여기에 다시 탄산나트륨이 첨가되어 이러한 물렁물렁한 비누가 딱딱한 모양을 갖추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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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불란서의 혁명 직후의 몇 년간은 향장 관련업이 주춤하였다. 그러나 곧 미국의 화학공업은 나폴레옹 전쟁으로 수입이 두절된 생산품의 제조에 전력을 기울여 크게 성장을 이루게 되고 이로 인하여 영국과의 교역량도 증대되었다.
19 세기 후반 빅토리아 여왕 시대는 전쟁으로 인해 남편을 잃은 부인이 많았는데 상복을 벗지 않고 화장을 하지 않았으므로 그것이 상류사회의 풍속이 되어 입술에는 연지를 바르지 않고 손수건으로 가볍게 문질러 혈색을 좋게 했다. 청초하고 꾸밈없는 여성의 아름다움이 화가들에 의해 이상적으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이때는 화장품 화학이 진보하여 남녀 할 것 없이 필요한대로 화장품을 구입할 수 있을 정도로 제품이 다양해지고 질도 향상된다. 그러나 메이크업 화장은 연극과 영화의 세계에 한정되어 '화장한 여자'라는 말은 성실치 못한 여성의 대명사처럼 되어 역시 소수 여성의 전유물일 수 밖에 없었다. 그 후 과학의 발달로 향장, 향료업계에서 이루어진 갖가지 변화들, 즉 새로운 화합물의 분리, 합성에 관해서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만큼 많다.
6) 향장과학시대 (20세기)
20세기 첫 작품은 콜드크림으로 1901년 개발되어 곧 널리 유행하게 된다. 질레트사는 안전 면도날을 개발했고, 영국의 미용사 네슬러는 금속 막대를 사용하는 파마 방법을 고안해냈다. 1907년 샴푸가 생산되기 시작했고, 1908년 '새로운피부'라 불린 손톱 락카가 선을 보인다. 1930년대에는 자외선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하기 위한 자외선 차단 제품이 개발된다. 1940년대에 호르몬 크림의 제조에 성공한다. 1950년대 이후의 화장품 과학은 급성장을 하게 되는데 이 시기에 합성세제, 치약, 각종 화장품 등이 선보이게 되며, 화장품 공업은 그 자리를 굳힌다. 또한 약리적 미생물학적 해독작용에 관한 연구가 활발해지고, 색소첨가물에 대한 규제가 많이 달라져서 화합물의 사용 농도가 크게 제한되기도 한다.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17세기까지만 해도 화장에 관한 문헌은 비전의 문헌(Book of Secret)으로 그쳤을 뿐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는 화장품 공업이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1940년대에 이르러 영문으로 화장품 제법에 관한 책자가 출간된 것을 비롯하여 많은 정보들은 정리되고 체계화되어 산업수준을 높이는 데 기여한다.
5. 한국의 화장품 역사
1) 고조선시대
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 목욕재계하고 향을 피웠다든지 신분 계급을 나타내기 위해 장식물을 달고 색을 칠했다는 것 등은 서양과 크게 다를 바 없으나 피부를 보호하고 피부를 희게 가꾸려는 노력이 일찌기부터 행해졌다는 것은 특이할만한 사실이다. 단군신화에 보면 환웅이 곰과 호랑이에게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쑥과 마늘을 먹으며 백일동안 굴에서 나오지 말고 해를 보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대목이 나온다. 식품학자들에게 있어 쑥과 마늘은 양념이 되겠지만 화장품학적으로는 쑥과 마늘은 미백제로 간주된다.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민간 처방에 의하면 쑥 달인 물에 목욕을 하면 피부가 희어지고, 마늘 찧은 것에 꿀을 섞어 얼굴에 붙이면 기미, 주근깨가 제거된다는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백일동안 한 것도 흰 피부를 숭상했기 때문이 아닌가 짐작해볼만 한다.
이 밖에도 한반도에 거주하던 말갈인들은 하얀 피부를 간직하기 위하여 오줌으로 세수를 하였고, 동북방 지역의 추위를 견디기 위하여 돼지 기름을 발라 동상을 예방하고 피부를 부드럽게 하였다. 지금의 평양 근처의 고분에서는 낙랑시대의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이 가운데 팔지, 귀고리 외에 거울, 칠기류가 나온 점은 화장의 역사를 가늠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낙랑 시대의 유물 중 채화칠협에 있는 인물상을 보면 머리는 단정히 정돈되어있고, 이마를 넓히기 위하여 앞머리털을 뽑았으며, 눈썹을 굵게 강조하는 등 미적 가치를 꽤나 추구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우리나라 원시 화장은 학자들 사이에 많은 이견이 있으나 대체로 이 시대의 문신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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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삼국시대
3세기에서 10세기에 이르는 삼국시대는 불교의 전래와 함께 불교문화의 영향을 받아 미용과 복식에 있어서 다분히 대륙적인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불교문화는 정치, 사상, 제도에서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일반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신라의 미의식은 건국신화에 나타나리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가 알에서 태어났을 때도 그 용모가 매우 수려했는데 목욕을 시켰더니 몸에서 광채가 났다고 했다. 그의 왕비 알영도 미모와 몸매가 뛰어남을 강조하였으며 단지 입이 새의 부리 같았으나 목욕 후 완벽한 아름다움을 찾았다고 했다. 이 시대에 목욕은 미를 더하기 위하여 또는 하나의 의식 수단으로 행하여진 듯 하다. 이 신화에서도 나타났듯이 신라인들은 아름다운 외모에 아름다운 정신이 깃든다는 일종의 영육일치사상을 갖고 있어 이 시대를 대표했던 화랑도 미소년이어야 했고, 얼굴에 분을 바르고 귀고리를 달았으며, 구슬로 장식된 모자를 써 치장을 하였다.
또한 불교가 성장하게 됨에 따라 향의 사용과 목욕이 대중화되었다. 절간에는 목욕재계를 위하여 대형 목욕실이 설치되었고, 세제로서는 팥, 녹두를 가루내어 사용하거나 수세미 껍질이나 부석으로 때를 밀기도 하고 밀기울이나 쌀겨를 무명 주머니에 넣어 목욕물에 띄워서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같은 목욕제를 사용한 다음에는 콩이나 팥의 냄새를 없애기 위하여 반드시 향을 사용했는데 향료로는 향기가 짙은 꽃을 말려 가루로 만들어 썼다. 이 시대의 향은 단순히 목욕용으로만 쓰인 것이 아니라 결혼, 출산의식, 그밖의 용도로도 많이 쓰였다. 화장문화도 동백이나 아주까리 기름으로 머리를 손질하였으며 분꽃씨 가루, 조개껍질을 태워 빻은 분말, 활석 가루 등으로 분을 만들어 물에 갠 후 얼굴에 발랐다. 그러나 부착력이 너무 약했으므로 후일 납을 함유시켜 처리한 연분을 만들어 쓰게 되었다. 또한 잇꽃의 즙으로 연지를 만들어 볼과 입술에 발랐으며 나무재를 개어 눈썹을 그렸다. 고구려 여인들의 화장문화는 5-6세기 경의 고분으로 추정되는 평남 용강군 소재 쌍용총의 벽화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이 벽화에는 귀족 부인과 시녀가 그려져 있는데 머리에 관을 쓰고 옷깃은 붉으며 뺨에는 연지가 찍혀있다. 벽화의 그림을 잘 들여다보면 고구려 여인들의 얼굴은 보름달처럼 둥글게 생겼고 눈썹은 짧고 뭉툭하게 그렸으며 머리는 틀어서 얹고 입술에 연지를 발랐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대륙에 오랫동안 전래하던 화장술로 요염한 자태를 나타내는 화장법이다.
백제의 모든 문화가 온건하고 부드러운 선을 나타냈던 것과 맥을 같이 하여 화장의 문화도 그와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두발과 화장은 곧 신분을 나타냈으며 대부분의 여인들은 은은하고 부드러운 화장을 위하여 분은 바르되 연지는 사용하지 않았다. 백제의 화장문화는 곧바로 일본에 영향을 주어 화장품 화장술 등이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3) 통일신라시대
통일신라에 이르러 여인들은 극도의 사치와 멋에 물들어갔다. 이 시대의 왕족들은 당나라에서 수입한 거북이 껍질로 장식한 빗을 사용하고, 옥과 상아로 만든 비녀를 꽂았다. 화장용구도 다양화되어 연분을 물에 적시는데 필요한 납작한 접시, 기름 등을 담을 수 있는 토기(놋쇠나 은그릇은 화장품을 담으면 변질을 일으키므로 토기를 사용했다), 털을 뽑는 족집게, 향을 담은 향낭 등이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또한 신라여인들의 얹은 머리 즉 사발은 신라의 독창적인 것으로 당나라 여인들의 선망을 사게 되어 당나라에서 이 가발을 사갔는가 하면 9세기 초엽의 신라는 가발을 공물로 당나라에 보내기까지 되었다. 이 밖에도 태환식의 귀고리, 금제 머리띠, 반지, 팔지 등의 사용이 보편화되고 화장기술 또한 상당한 발전을 보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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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고려시대
고려도경에 보면 고려인들은 남녀가 한 개울에서 목욕을 했으며, 하루에도 서너 차례씩 목욕을 했다고 한다. 부유층의 여인들은 난초를 삶은 물에 난탕을 하여 희고 부드러운 살결을 간직하려 했고, 몸에서 향내가 나도록 하였다. 향에 대한 애착은 어느 시대보다고 더하여 신체나 옷에 향유를 뿌리거나 발랐으며 비단 향낭을 여러 개 씩 패용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고려 여인들의 아름다워지고자 하는 욕망은 아마 현대 여성도 따라가기 힘든 정도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화장술은 신분에 따라 약간 구분되어 기생은 분을 도포한 듯 얼굴을 희게 표현하고 눈썹은 뽑아 가늘게 그렸으며 머릿기름을 반질거리도록 발랐다고 한다. 또한 염색이 모든 계층에 유행하였으며 빗, 거울, 세숫대야 등 화장용구도 기술자를 두어 제작하였다. 화장품에 대한 기록도 역시 고려도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병에 담아 피부에 발랐다는 대목을 보면 이 시대의 화장품이 로션이나 크림의 중간 타입이 아니었을까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연분을 만들어 백자에 담았는데 가루를 물에 개어 쓸 수 있도록 아랫부분은 접시 모양이며, 뚜껑을 만들어 씌운 분합은 색깔을 넣어 장식하는 등 용기에도 매우 신경을 쓴 것을 엿볼 수 있다.
5) 조선시대
조선시대의 지배층은 고려시대로부터 이어 내려오던 극에 달한 사치 풍조에 대하여 금지령을 내렸고 사회 내부에서도 퇴폐풍조에 대한 반작용으로써 외면적인 화려함이 감소하고 내면의 미가 강조되었으며 근검절약하는 풍조가 생겨났다. 일반인들의 치장은 단백하여 아름답고 깨끗한 피부에 주력하였으며, 나들이, 모임 등 의례때에만 화장과 장식을 하였고, 기생, 궁녀, 음악인 등 직업 여성들만이 짙은 화장을 하였다. 정유재란과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사회는 일시 경제적 빈곤에 빠지지만 화장품에 대한 연구는 많이 진행되었다. 선조 때에 고도의 기술로 화장수 '조의로'가 제조되었으며, 이는 일본까지 건너가게 되어 조선의 높은 화장 문화에 대한 명성을 떨쳤다. 숙종 때에는 화장품 방문판매원인 매분구가 생겨났다. 매분구들은 당시 외출이 자유롭지 않았던 조선 여성들이 쉽게 화장품을 구입할 수 있게 해주었고, 미용에 대한 지식도 알려주었다고 전해진다. 미용법도 발달하여 조선시대 규합총서에는 '겨울에 얼굴이 거칠어지고 터지는데 달걀 세 개를 술에 담가 김새지 않게 봉하여 네 이레 두었다가 바르면 얼굴이 트지않고 옥같아 진다' 등 등의 미용법이 수록되어있고, 이밖에 여러 가지 두발의 형태, 입술연지 그리는 방법, 눈썹 그리는 방법 등의 내용도 담겨져있다. 이 시대의 바람직한 여인상으로서는 둥근 얼굴에 야위지 않은 모습으로 살빛은 희고, 흉이나 잡티가 없으며, 머리숱이 많은 부자집 맏며느리 상이 최고로 꼽혔다.
'미인박명'이라 하여 미인을 기피하였던 때도 바로 이 시기이다. 화장은 얼굴에 분을 바르고, 연지는 그리되 자기 본래의 모습은 크게 벗어나지 않도록 하였으며 단지 깨끗하고 흰 피부를 숭상하여 꿀 찌꺼기로 팩을 하거나 오이 꼭지를 피부에 문지르기도 하였다고 한다. 나라에서는 향장, 분장으로 나누어 향장에는 향을 제조하고, 분장에서는 일반 여인용 분, 기생용 분을 나누어 제조하였으나 수요를 충당하지 못하였고, 일부 연지 가게, 분 가게에서 만든 연지나 분은 단독(수은 성분), 분독(납 성분) 때문에 문제시 되었으므로 일반인들은 화장품을 직접 만들어 썼다.
6) 개화기
후진국이라 경멸했던 일본은 일찍이 유럽에 대한 문호를 개방하고 새 기술로 무장을 하게 되었다. 조선왕조도 1876년 외세에 밀려서 어쩔 수 없이 개항을 하게 되었고, 그 이후 정치적, 문화적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미용분야도 예외는 아니어서 왕국에서는 은에 칠보로 장식한 은문갑에 가루를 넣어 사용하였지만 바깥에서는 재래식 화장품이 외국의 신식 상품에 완전히 밀리게 되었다. 일본이나 유럽 등지에서 수입된 크림, 백분, 비누, 향수 등은 사용이 간편하고, 포장, 품질 등이 뛰어나서 큰 인기를 끌었으며, 이는 국내 화장품의 산업화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따라 1916년 박승식이라는 사람이 품질 및 포장이 개선된 분을 제조하여 그의 성을 따 '박가분'을 탄생시켰다. '박가분'은 1922년 제조 허가를 받아 관허 1호 화장품이 되었는데 한때 모든 여성의 선망이 대상이 될 만큼 인기를 모았으나, 납성분에 대한 부작용 때문에 물의를 일으켜 1937년 자진 폐업하였다. 아무튼 그 당시에는 박가분을 시발로 하여 서가분, 정가분, 서울분, 설화분 등 각종 분류와 유액, 머릿기름이 신식 기술을 모방하여 잇달아 시판되었고, 크림도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화장품에는 부향율이 점차 높아져 다소 짙은 향을 풍겼고, 입술 색깔도 진해졌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쪽머리는 잘라 파마를 하게 되었고, 뽀족 구두에 양산을 쓴 신여성 차림이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렇게 파격적인 변혁이 일게 되자 기생과 접대부들은 더욱 판을 치게 되었고, 신소설 '자유부인'이 크게 인기를 끌면서 여성들에게 개방적인 사고방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러한 개방적 사고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더욱 더 화장이 이전보다 짙어진 경향도 옅볼 수 있다. 남성들에게도 상투가 사라지면서 모발을 정발하기 위하여 포마드가 다량 생산,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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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현대
광복과 6.25를 거치면서 밀수 또는 수입품으로 외제 화장품이 그 어느 때보다 범람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에 위축되지 않고 국내에서도 1960년대부터 화장품의 생산활동이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화장품의 기능도 세분화되어 백분의 사용은 격감되고, 도포력, 부착력이 우수한 액상 백분(화운데이션)이 크게 인기를 끌었으며, 바니싱크림, 스틱형 연지 등이 생산 사용되었다. 잡지와 신문에는 서구적 화장법이 소개되었고 그 이후부터는 세계와의 정보 교류가 활발해짐에 따라 패션 정보의 입수가 용이해져 여성들은 빠른 속도로 유행을 흡수하고 변모되어 갔다. 화장품의 품목별 증가와 아울러 그 대상도 폭이 넓어져 남성용, 어린이용에 이어 최근에는 주니어용 화장품도 개발되기에 이르렀고, 용도별로 전신용 제품, 두발 전용 제품이 다양하게 시판되고 있다. 1962년 본격적으로 시작된 방문 판매는 80년대 중반까지 국내 화장품 유통의 주요 경로였으나 83년 이래 종합 코너의 증설로 제도 판매로 이행되는 과정에 있어 유통 경로는 복잡, 다양해지고 있는 추세이다. 1980년 후반 정부는 국내 기업의 기술 축적과 국제 경쟁력 강화를 위해 기술 도입과 합작 투자를 대폭 개방하였고, 이어 93년도 말 경에는 화장품 소매업에 대한 외국인 투자가 개방되어 제조부터 판매까지 외국 자본이 진출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미 수많은 외제 화장품들이 범람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국내 화장품은 외국 자본과 기술에 대항하여 치열한 경쟁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고령화 사회로 옮아가고 있는 것은 국내도 마찬가지여서 노화를 예방하고 젊음을 유지시키려는 노력이 이루어져 최근 피부 관리실도 상당 수 증가하고 있으며, 노화를 근본적으로 지연시킬 수 있는 최첨단 신소재, 최신 공법을 이용한 기능성 화장품도 속속 개발되고 있다.
6. 화장품 성분
[보습]
피부 노화가 진행되면 예전에 비하여 피부가 건조해지고 거칠게 된다. 그러므로 보습제가 필요한데 보습제는 피부타입, 계절, 컨디션, 부위에 따라 적절하게 사용해야 한다. 완전히 건성인 부분은 유성과 수성 성분을 모두 보충하고, 지성이면서 각질이 날리는 경우에는 수성 보습제로 적절히 수분 공급을 해준다.
1. 물
2. 유화제(emollients)
피부 표면에 밀폐막을 만들어서 수분이 외부로 발산이 되지 않게 하는 성분이다. 바셀린, 라놀린, 광물성 기름과 같은 유성(油性)성분이 이에 속한다.
3. 흡습제(humectants)
대기 중의 수분을 흡수하는 기능을 가지는 성분이다.
가장 보편적인 성분으로는 글리세린과 propylene glycol 이 있다.
4. 자연 보습 인자(natural moisturizing factors:NMF)
원래 인체에서 만들어져 피부의 보습을 유지시키는 성분인데 이것을 합성해서 화장품 성분으로 이용하고 있다.
lactic acid, urea, collagen, hyaluronic acid, sodium pyrrolidone carboxylate(NaPCA), mucopolysaccharides 가 여기에 속한다.
5. 기타 보습 성분
알로에, 호호바 오일, 야자유, 아보카도 오일, allantoin, phosholipid, 세라마이드, AHA, 레티놀, vitamin E, C 등도 모두 보습기능이 있어 보습 목적으로 사용한다.
[주름 및 탄력저하]
피부의 진피층 내에서 분해되어 양이 감소된 탄력 성분의 합성을 촉진시키기 위한 제품. 레티놀, 비타민 C, AHA 가 가장 대표적이다.
[화이트닝]
흑자, 기미, 잡티 등 뚜렷한 색소 외에도 전반적인 피부의 얼룩거림, 칙칙함이 생긴다.
화이트닝
제품 화이트닝 제품에 함유되는 물질은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멜라닌 세포내 멜라닌 색소를 만드는 과정에 작용하여 멜라닌 색소의 생성을 억제하는 물질, 둘째 각질세포를 벗겨내어 침착된 멜라닌 색소를 제거하는 물질, 셋째 자외선을 차단하는 물질이다.
1. 첫째 그룹에 속하는 대표적인 물질로는 알부틴, 코직산, 비타민C, 하이드로퀴논, 여러 가지 미백 효과가 있는 식물 추출물 등이 있다. 이 중 하이드로퀴논은 탈색 효과가 가장 강력하여 화장품보다는 피부과 연고에 포함되며 알부틴, 코직산은 하이드로퀴논제제보다는 탈색효과가 약하다. 비타민C가 색소 세포의 기능을 억제하여 색소생성을 억제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로 여러 화이트닝 제품에 쓰고 있으나 매우 불안정한 물질이기 때문에 단순히 피부에 바르는 것만으로는 피부에 흡수가 어려워 화이트닝에 효과적인 제품들이 별로 없다. 미백 효과가 있다고 알려진 식물 추출물로는 닥나무, 상백피(뽕나무 뿌리껍질 추출물), 감초추출물 등이 있다.
2. 둘째 그룹에 속하는 물질에는 AHA, BHA, retinoid이 있다. 그 중 AHA가 최근에 각광받고 있으나 5% 이하로 함유된 제품은 보습제의 기능만 있으며 5% 이상이 되어야 피부가 약간 벗겨지는 효과가 있다. 실제적인 필링효과는 고농도의 AHA를 사용하는 피부과 시술인 스킨스케일링에서 가장 크다.
3. 셋째 그룹의 자외선 차단물질은 각종 기초 화장품에서 색조화장품에까지 포함되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 차단효과가 약하기 때문에 자외선 차단제를 따로 발라주어야 한다.
이런 성분들은 멜라닌이 만들어지는 각 단계에 작용하여 멜라닌 생성을 억제하거나 이미 침착된 멜라닌을 분해하는데, 이미 진해진 주근깨나 기미는 큰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고 미리 예방하는 차원에서 사용하면 효과를 볼 수 있다.
[식물 추출물]
식물성 추출물의 대다수는 플라보노이드, 카로티노이드, 피토스테롤, 에센셜 오일, 탄닌, 사포닌
등의 성분을 함유하고 있어 피부관리에 효과적이다.
해조류 추출물
신체의 노폐물 제거와 신진대사를 촉진시키며 셀룰라이트 분해에 효과적이다. |
피부혈관을 보호해 붉게 달아오른 피부를 진정시켜주며 항산화 작용으로 피부노화를 방지하는 효과가 있다.
카로티노이드
자외선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한다.
피토스테
화학 구조와 계면 활성 작용도가 콜레스테롤과 유사해 화장품에 주로 사용되고 있다.
에센셜 오일
방향유라고도 불린다. 약물로 이용되는 아로마 테라피는 중세 유럽에서 유래된 것으로 살균 소독 진정 등의 효과로 인해 지금까지 활용되고 있다.
탄닌
피부 노화방지, 화농방지, 피부 표면의 트러블을 방지하는 효과가 있다.
사포닌
식물에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는 성분으로 항염증, 항부종, 항셀룰라이트 기능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7. 참고문헌
*http://blog.naver.com/sseran/4291982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php?where=pvidx_xml&bknu=02020016&secnum=3&bid=1440996&menu=cview
*yunam.tnut.ac.kr:8005/~chemeng/pds/pds_file/%C8%AD%C0%E5%...FC%B0%ED%C0%DA%B7%E1).do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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